Skip to content

2009.06.01 11:54

6월 월간지 훈화

조회 수 942추천 수 4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레지오와 본당

베데 맥그리거/장훈 요셉

본당은 레지오를 가장 레지오답게 하는 곳이며, 레지오 사도직 활동의 중심입니다. 주교의 허가 없이는 어느 교구에서도 레지오 활동을 할 수 없으며, 본당 사제의 허가 없이는 본당에서의 활동도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레지오가 가지고 있는, 지혜롭고 실제적인 관리 규정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또는 단순히 법적으로 꼭 필요한 사항이나, 대외용 정책으로만 볼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가톨릭 신앙의 심오한 교리인 ‘그리스도 신비체’ 교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 교리는 모든 레지오 활동이나 사도직 활동에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원칙입니다. 그리스도 신비체 교리 없이 레지오에 대해 바르게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레지오 활동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모든 사도직 활동에서, 신비체 교리를 생활화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가르침에서 보듯이 성모님과 관련된 모든 교리들도 ‘그리스도의 신비’와 ‘그리스도 교회의 신비’ 안에 존재합니다. Toher 신부가 첫 번째 레지오 창립 회합에서 신비체에 관하여 훈화를 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거룩한 섭리의 작용이 분명합니다.

‘레지오와 본당’이라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더 해 보겠습니다. 본당이란 일정한 지역에서,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 신비체’입니다. 성직자는 머리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평신도는 지체인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머리와 지체는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머리와 지체는 서로를 도와줍니다. 성직자에게는 평신도가 있어야 하고 평신도에게는 성직자가 있어야 합니다. 성직자와 함께 일한다는 것은 복되신 우리 주님과 함께 일하는 것과 같습니다. 레지오는 이 교리를 잘 알고 있으며, 이 교리를 어떻게 실천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레지오는 지체인 모든 신자들 안에서 우리 주님을 뵙고 주님을 위해 봉사하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모든 비신자들을 교회로 데려오도록 애씁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께는 ‘예’ 하고, 교회에는 ‘아니오’ 라고 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아무도 교회와 그리스도를 분리시킬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에 ‘아니오’라고 응답하는 사람은, 당신의 몸인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응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모님은 본당에서의 레지오 활동에 또 다른 강한 동기를 주십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 그분만의 어머니가 아니라, 신비체인 교회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성모님은 교회의 모든 구성체의 어머니이며, 또한 모든 본당의 어머니이십니다. 레지오 단원들은 본당이 가지고 있는 성모님의 모성을 나누어 가지려 노력합니다. 레지오 단원은 본당에 성모님이 현존하시도록 애씁니다. 레지오 단원은 본당에서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을 고백하고 실천하려 노력합니다.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은 사도직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레지오는 본당에서 평신도 사도직 활동이 활발해지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한 차례 훈화에서 레지오와 본당과의 관계에 대해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레지오 창설자 더프 형제는 레지오는 복음 전파 활동을 할 때, 주님이 하신 방법을 모범으로 삼아, 가능한 한 똑같이 그것을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레지오 교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일손을 돕고자 모여든 열심한 신자들에게 둘러 싸여 있는 사제의 모습은 바로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온 세상을 회개시키려고 준비하실 때 당신이 뽑은 사람들을 주위에 불러 모아 가르치시고 당신의 정신을 넣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은 그 가르침을 배운 대로 실천에 옮겨, 그들을 도와서 영혼을 구하는 일에 나설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교본 10장 4)

레지오가 복음을 전파할 때, 가장 즐겨 쓰는 방법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머리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본당 사제 주위에 모여서 사제와 함께 본당의 모든 사람들, 신자나 비신자 구별 없이 모든 이들에게 영적으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 사람들이 어떤 처지에 있건 모든 본당 구성원의 구원을 위해 활동하기.

온 세상이 레지오의 본당이긴 하지만, 그런 의미를 제외하더라도 본당이 레지오 사도직을 실천하는 유일한 장소는 아닙니다. 레지오는 주교의 요청과 허가를 받아 본당의 경계를 뛰어넘는 여러 사도직 활동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본당은 레지오가 존립하고, 레지오가 사도직 활동을 수행하는 우선적인 장소가 분명합니다.

이 논의가 더욱 활발해지기를 바라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에서 발췌한 내용으로 훈화를 마치겠습니다.

“본당은 공동체 사도직의 훌륭한 표본입니다. 본당은 그 안에서 발견되는 인간적 다양성을 모두 하나로 모아, 교회의 보편성에 융합시킵니다.

(1) 평신도는 자기 사제들과 친밀히 결합되어 본당에서 일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2) 평신도는 자신과 세상의 문제, 또 인간 구원에 관한 문제들을 교회 공동체에 들고 와서 의견을 나누며 연구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본당의 사도직과 선교활동을 힘껏 도와야 합니다. 평신도들은 또한 교구의 중대성을 언제나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본당은 교구의 세포와 같은 것이므로 교구의 사목자인 주교의 부르심이 있을 때에는 언제나 협력할 각오가 서 있어야 합니다.

(3) 그 뿐 아니라, 도시와 농촌의 필요에 대처하기 위하여 그 협력 태세를 본당이나 교구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초본당적, 초교구적, 전국적, 국제적인 분야로까지 넓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날이 갈수록 인구 유동이 심해지고 상호관계가 발전하고 커뮤니케이션이 편리해짐에 따라 사회의 어느 부분도 이제는 저만이 폐쇄된 상태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선교활동을 자기 임무로 여겨서 물질적 내지 인적 원조를 제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받은 좋은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요 영예입니다.” (평신도 교령 10 ‘교회의 공동체들’)

아직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가톨릭 신앙을 가졌다가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가톨릭 신앙이라는 주님의 선물을 전해주는 것은 우리 레지오의 가장 큰 영광이며, 특권입니다. 아멘.




주님께서 저의 꿈을 바꾸어주셨습니다.

                                                                                                         김양회 요한보스코


저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이 저의 꿈이었습니다.
저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쁘고 마음씨 고운 여자를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사는 것이 저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저를 위하여 다른 꿈을 꾸게 해주셨습니다.

광주 무등산자락에 성모마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인적이 없는 깊은 산속에 나환우들만 모여 사는 조그마한 동네였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레지오 활동을 하면서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단원들의 손에 이끌려 어디를 가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가는지도 모르면서
야유회 가는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방문하고 돌아온 날부터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레지오 단원들은 왜 그런 곳을 방문하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방문하는지
며칠이 지나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살지 말고
이웃을 위하여 살아야한다’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신앙인이라면 어렵게 살아가는 이웃을 찾아
그들을 위로하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과 함께, 그리고 예수님을 닮으려면
이웃에게 봉사하고 이웃을 사랑해야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관심과 꿈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를 극진히 사랑해주시고 있다는 것도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저를 예수님께서 사셨던
봉사의 길로 부르시어 사제의 길을 걷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께 약속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 다짐하고, 다짐을 했습니다.

‘주님, 당신 종이 여기 왔습니다. 오로지 주님만을 따르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봉사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봉사하러 오신 것처럼
저도 주님처럼 봉사하면서 살겠습니다.’

저는 지금 주님께서 바꾸어주신 꿈을 따라
20년이 넘도록 사제로서 살아왔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고
외쳐온 세월이 20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입으로만 외쳐왔지, 외친 것을 살지 못한 저의 모습이
부끄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제답게 살려면 얼마나 많은 고민과 갈등을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삶을 살려면 내 자신과 얼마나 많이 싸워야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점점 편리함과 안락함에 길들여지는 제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아닌데’ ‘이래서는 안 되는데’라고 자책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사제로서 봉사의 삶을 산다면서
이웃을 인정해주기보다는 내가 먼저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이웃에게 베풀기보다는 받는 것을 더 좋아했고, 받는 것에 익숙해져버렸습니다.
이웃을 위로해주기보다는 내가 위로받기 원했습니다.
사랑하자고 외쳐왔지만, 정작 사랑은 하지 않고 미워할 때가 많았습니다.
나를 내어준 것이 아니라 나를 내세웠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등에 업고 마음껏 누려왔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저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집을 뛰쳐나가 모든 재산을 탕진해버리고 거지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을
기쁨으로 안아주신 아버지처럼 하느님께서는 저를 반갑게 받아주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게 ‘너는 왜 죄를 지었느냐?’고 묻지도 않으시고
‘다시는 죄짓지 말라’하시며 자비롭게 용서해주신 예수님께서는
저에게도 책망이나 어떤 질책도 하지 않으시고 당신 품에 안아주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화를 내시면서 책망을 하시고 외면해버리실 것 같은데
번번이 당신 뜻을 저버렸던 저를 다시 받아주시고 일으켜주시어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무관심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저를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 곁에서 늘 저를 지켜보시는 분이셨습니다.
제 생각과 마음이 하느님께로부터 떠나있었을 때도 저를 늘 지켜보시고
제 삶의 방향을 바로잡아주시고 좋은 길로 인도해주시는 살아계신 분이셨습니다.

다만 저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돌이켜보아
부끄러운 마음을 갖도록 하시는 하느님,
양심을 들여다보게 하여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깨우쳐주시는 하느님,
그렇다고 의기소침하게 살지 말고
앞으로는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살도록 독려해주시는 하느님,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용서해주시면서 넘어졌더라도 다시 일어나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또다시 걸을 수 있도록 두 손을 잡아 주시는 하느님,
저의 소박한 꿈을 바꾸어주시어 사제의 길을 걷도록 인도해주신 하느님께서는
저를 극진히 사랑해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좋으신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드립니다.

주님,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잘못과 죄를 많이도 범했습니다.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저를 용서해주시고 일으켜주셨으니
주님께서 가신 길을 또다시 따라 걷겠습니다.

그러나 주님, 언제 또다시 주님의 뜻을 져버릴지 모릅니다.
바로 그때 그 자리에 주저앉아있지 않고 다시 일어나
주님의 길을 계속 걸을 수 있도록 저의 두 손을 잡아주십시오.

주님, 저의 결심과 의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무너져버립니다.
저는 언제 또 넘어질지 모를 정도로 나약하고 부족합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이 세상 마칠 때까지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주님, 제 인생 다하는 날까지 저의 두 손을 잡아주십시오.
저의 꿈을 바꾸어 주신 주님,
주님께서 불러주신 사제의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주십시오.

광주 세나뚜스 지도신부



세상 모든 일을 믿음의 눈으로

                                                                                                 김진룡 안토니오



피정 중에 어느 老 주교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주교님이 사시는 한적한 곳에 주교님이 오심으로써 흩어졌던 교우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생활나누기'도 이루어지는데 그 중 한 자매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올해는 텃밭에 딸기를 심었습니다. 처음 해보는 딸기 농사인지라 정성을 더 들였더니 탐스러운 딸기를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나누어 먹고 이웃도 나누어주었지만 그래도 딸기는 넘치게 많아 장에 나가 팔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가판을 깔아놓아도 손님은 오지 않았습니다. 저녁때가 되어 안절부절 못하면서 속으로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느님, 제가 돈 벌 욕심으로 지금까지 있었는데, 상해버릴 딸기 파는 것보다 누구라도 싱싱할 때 저 딸기들을 맛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한 사람 두 사람이 조금씩 딸기를 사가더니 금세 다 팔게 되었습니다. 역시 좋은 맘으로 기도하니 하느님이 도와주셨습니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오고 "그래 맞아." "역시 00자매님이야" 등 추임새도 잇달았습니다. 그러고는 모든 회중이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돌아가며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주교님은 처음엔 의아했습니다. "아니 가판에서 딸기를 못 팔다가 기도 한번 하고선 딸기를 팔았다는 게 뭐 그리 감동하며 감사할 일인가?" 그렇지만 그들의 표정에서 순수한 믿음을 확인하게 되자, 주교님도 감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경험이지만, 또한 딸기가 그리 잘 팔린 것이 우연한 상황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상황을 믿음과 연결시켜 생활하는 소박한 마을사람들의 생활이 감동이었던 것입니다.

아마 이 이야기를 들으시는 분들 가운데도 별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드리면 어떨까요?

"세상 모든 일을 믿음의 눈으로 보십시오."

진지하게 질문을 숙고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소박한 반모임의 분위기를 짐작하실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이름 없는 풀 하나, 살랑대는 봄바람, 가뭄에 타들어가는 논바닥, 쏟아지는 소낙비, 시장에서 호객하는 소리, 이웃집 아저씨의 작은 사고, 학교에서 돌아오며 쏟아내는 자식들의 수다까지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세상일 것입니다. 적어도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레지오 마리애는 세상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만보는 존재가 아니라 그 '믿음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분들의 모임이라면 그렇게 작은 일상사를,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의 하루'였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다른 편에서 보자면, 세상을 믿음이 아니라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런 경향이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단순하지 않고 여러 생각들을 동시에 고려한다는 것이겠지요. 상관관계를 고려하고 상황을 파악한 후 나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통해 행동한다고 말하겠지요? 그럴 것입니다. 아마 그게 세상을 영리하게 사는 방식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믿음의 눈이 없다면, 아니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시선이 없다면 그 판단은 결국 자신의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놓으셨던 그 현명하지 못한(?) 판단이 자신과 세상을 살리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주님의 이 심정은 비단 그 때만이 아닐 것입니다. 하루 생활 중 한쪽 눈만 지그시 감아도 믿음이 아니라 세상물정으로 살라고 이곳저곳에서 아우성입니다. "에이~" 하고 다른 눈마저 감아버리면 온통 이리떼 속에 있는 듯한 현실에 직면합니다. 모든 것이 자신을 해치려는 듯 최면에 걸립니다. 그래서 '움켜쥐고', '공격하며', '자신을 방어하는 데' 하루해가 저뭅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입니다. "아 오늘도 살았구나!"

우리는 모두 주님이 다시 살려놓은 이 세상에서 '다시 살고 있는 이들'입니다.

보이십니까? 가뭄에 허덕이다 다시 솟는 새싹이.

보이십니까? 죽은 듯 여겨졌던 우리의 삶에 희망이 솟구치는 것을.

보이십니까? 고통 속에 주님의 손길이 거기 있었다는 것을...

주님이 부활하신 이 축제의 기간, 우리 레지오 마리애의 동료들과 그런 증언을 서로 나누어 보십시다.

                                                                                            
전주 레지아 지도신부




2024 . 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마산 치명자의모후 레지아
51727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북16길 27
전화 : 055-249-7115 , 팩 스 : 055-249-7086

Copyright (C) 2020 Diocese of Masan. All rights reserved.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