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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2 10:03

7월 월간지 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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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와 본당 2

베데 맥그리거/장훈 요셉


레지오와 본당의 관계는 너무나 중요해서 또 다른 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레지오는 일반적으로 본당에서 본당 사제와의 긴밀한 협조 속에서 활동을 합니다. 이런 이유는, 지난번 훈화에서 살펴보았듯이 본당이란 일정한 지역에서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 신비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신비체’는 레지오에게는 가장 중요한 교리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포도나무의 가지로서, 우리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분의 삶과 사명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모든 형제자매 안에서 우리 주님을 만나고, 그에 알맞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매일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사랑으로 가득 찬 생생한 믿음을 주소서. 우리가 이 믿음에 힘입어, 당신을 향한 우리의 순수한 사랑으로, 모든 활동을 하게 해주시고, 우리 이웃 안에서 당신을 만나고, 당신을 섬기게 해주소서.”

레지오 마리애 창설자 더프 형제는 그리스도 신비체 교리를 수백만의 가톨릭 신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생활화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더프 형제가 교회에 기여한 가장 훌륭한 공헌 중의 하나입니다. 만약 본당이 그리스도 신비체의 일부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본당은 본당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레지오는 이제까지 보여 준 본당의 모습과 조화를 이루어 레지오의 제 역할을 다 하고, 본당발전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사제는 레지오 활동과 평신도 사도직의 중심이 되는 걸까요? 간단히 말하면, 사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레지오 단원들은 온 마음을 다하여 오직 주님과 함께, 주님을 통하여,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활동하고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레지오 교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통찰력이 돋보이는 부분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레지오는 정해진 규율에 따라 사제에게 존경과 순명을 드리지만, 단순히 그 정도로 그치지는 않습니다. 이는 레지오 사도직이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와 성사를 가장 중요한 은총의 수로로 삼고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레지오의 모든 노력과 활동의 방법은 병들고 굶주린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의 양식을 가져다주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레지오 활동의 근본 원리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사제를 모셔다 드리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항상 사제를 직접 모셔 가기는 사실상 힘들고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레지오가 할 일은 사제의 영향력이 어느 곳에나 미치도록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사제가 하는 일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레지오 사도직의 기본 사상입니다. 레지오는 평신도를 그 단원으로 삼아 사제들과 일치하고 사제들의 지도를 받아 사제들과 전적으로 똑같은 관심을 지니고 활동하게 합니다. 레지오는 사제들의 노력을 보완하고 사람들의 삶 속에 사제가 차지하는 자리를 넓혀, 사람들이 사제를 받아들임으로써 마침내 이들을 보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도록 온갖 열성을 다 바치는 것입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가 보내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인다.’(요한 13,20)”(교본 10,3)

더프 형제는 다음과 같은 매우 강한 표현을 썼습니다. “레지오와 레지오 단원은 사제의 관심과 완전히 일치해야 한다.” 왜 그래야 할까요? 사제에게는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로 모셔오는 것, 그리고 사제가 몸소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은 레지오의 참 창설자이신 성모님을 떠오르게 합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모셔오는 단 하나의 목표를 갖고 계십니다. 이것은 성모님과 사제의 관심이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로써 우리는 왜 레지오 단원들이 사제의 관심과 사명에 완전히 일치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여러 심오한 방법으로 사제의 모든 활동에 참여하시며, 사제를 통하여 일을 하십니다. 따라서 레지오는 성모님이 바라고 하시는 그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일반적으로 본당에서 본당의 사제를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이 주실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을 주십니다. 하느님은 사제가 집전하는 성체성사와 희생제사를 통하여 우리 안에 우리 주님이 참으로 살아 계시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은 화해의 성사를 통하여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하느님은 병자성사의 도유를 통하여 우리가 병들고 죽어갈 때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분은 우리 결혼의 증인이 되시고 우리를 축복해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시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가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도록 해 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항상 어머니의 눈으로 사제를 지켜보십니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며 이런 이유로 우리 레지오도 어머니와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당과 레지오의 관계가 일방적인 관계는 아닙니다. 레지오가 본당에서 활동하게 되면 레지오는 레지오가 가지고 있는 온갖 보화를 본당으로 가져 옵니다. 레지오는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이라는 누룩으로 본당을 번영하게 만듭니다. 레지오는 열정적인 전교정신과 사도직 정신을 보여 줍니다. 레지오는 매일 미사와 성찬전례에 열심히 참여하여, 본당을 미사와 성찬식의 중심이 되게 합니다. 레지오는 상황이 좋을 때뿐 아니라, 특히 문제가 생기거나 교회가 공격을 당할 때에도, 커다란 기쁨의 정신과 열렬한 충성심을 보여 줍니다. 레지오는 성모님처럼 사제와 본당 가까이 머뭅니다. 레지오는 말만 앞서는 게 아니라 실제로 행동하는 많은 평신도들을 모아 옵니다.

레지오가 본당에서 활동을 못하게 되면 본당은 많은 은총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라도 레지오는 커다란 인내를 가지고 본당과 사제를 항상 사랑하고,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본당과 사제를 위해 기꺼이 봉사할 것입니다. 레지오는 세상 어느 곳에 있건 본당과 본당 사제들을 한없이 사랑하고, 끊임없이 도와야 합니다. 아멘.







매일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복된 사람들!

문양기 다니엘 신부


친애하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 여러분!

언젠가 동료신부님이 라디오에서 들었다면서 “생각을 조심하여라! 생각이 네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하여라! 말이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하여라! 행동이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하여라! 습관이 인격이 된다./ 인격을 조심하여라! 인격이 운명이 된다.”라고 전해주시더군요. 그런데 어느 잡지에선가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제임스 윌리암(1842-1910)의 지론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을 바꾸면 성품이 바뀌고, 성품을 바꾸면 운명이 바뀐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무엇인가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가장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은 바로 나의 생각이다!”역시 사람이 마음 하나 바꾸면, 생각 하나 바꾸면 세상만사까지도 달라지나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단원으로서 묵주기도를 잘 드리고 계시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잘 바치는 그 묵주기도를 앞으로도 항상 애정을 갖고 기쁘게 봉헌하면서 단원으로서의 삶에 줄기차게 임하시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무릎을 꿇거나 정좌하는 등 바른 자세에 국한하지 않고, 이동하면서 자연스러운 자세나 심지어 불편한 경우엔 누워서 바칠 수도 있겠죠? 이야기하듯이, 읽고 노래하듯이, 시를 읊듯이 자연스레 바칠 수도 있겠죠? 요컨대 묵주기도를 수시로 가까이 봉헌하며 사시란 것입니다. 묵주기도야말로 복음서의 요약을 성모님과 함께 장미꽃으로 엮어 하느님께 봉헌하는 기도중의 기도이니까요.

저는 묵주기도 하면 떠오르는 원로신부님이 계십니다. 그 신부님께서는 신학교 입학하기 전에 묵주기도를 너무나 힘들어했답니다. 반복되는 기도문이 지루해서 신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묵주기도에 관한 생각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답니다. 그러다 명색이 신학생인데 어떻게 묵주기도도 제대로 안하고 사나, 신학교 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라도 적어도 하루에 묵주기도 한번은 해야겠다! 라고 다짐을 한 후 시행을 하셨답니다. 처음엔 쉽지 않았지만 계속 하니 되더랍니다. 사제가 되어서도 매일 묵주기도를 하면서 살아오던 어느 날, 묵주기도를 하루에 15단 해야겠다라고 결심을 하셨답니다. 이왕이면 환희의 신비 5단, 고통의 신비 5단, 영광의 신비 5단 도합 15단을 봉헌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처음엔 열심한 마음으로 좀 되는 듯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잘 안되고, 게다가 이거 쓸데없는 결심하여 오히려 하느님께 헛맹세하고 실없는 인간이 되는 게 아닌가라며 한심스러워지기도 했지만, 주님께 성모님께 도우심을 청하며 계속하다보니 또 되더랍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인즉 “역시, 묵주기도 목표는 못할까봐 낮출 것이 아니라, 높게 정해 바쳐야 한다.”

2003년에 묵주기도가 완성됩니다! 환희의 신비에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로 끝나고, 고통의 신비는 예수님의 수난 고통으로 이어지며, 그리고 영광의 신비에서는 부활로 이어지는 분위기를 접하며, 무언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묵주기도는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묵주기도에 빛의 신비를 덧붙이심으로써, 드디어 묵주기도가 완성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저는 그 원로신부님에게 하루에 20단씩 바치시는지 여쭙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원로신부님은 어떤 답변을 하셨겠습니까?“20단, 한다!”가 정답이었으면 좋으련만, 신부님의 답변은? “20단, 하려고 노력한다!”셨어요! 역시 어렵긴 어려운가 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묵주기도란 새로운 봄을 체험하게 하는 가장 감동적인 사랑의 표현중의 하나이고, 매일 다시 살아남을 만끽하는 기도이며, 예수님의 생애를 매일 체험할 수 있는 심오한 방법”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 여러분!

묵주기도를 가장 잘 바치는 사람들이 바로 레지오 단원 여러분들이쟎습니까? 묵주기도를 그저 많이 바치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묵주기도 중에 심오하게도 매일 예수님의 생애를 체험하는 것이니, 이 얼마나 복되고 복된 일이겠습니까? 기도함으로써 기도하게 된다고, 묵주기도를 수시로 봉헌하며 예수님도 시시각각으로 만나고, 그 예수님의 사랑의 삶과 선교의 삶을 전적으로 닮아 살도록 노력해 봅시다! 아멘.

춘천 Re. 담당사제




레지오 마리애 단원의 기도생활

손병익 루카


레지오 마리애의 목적은 단원들의 성화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교회의 지도에 따라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완성해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와 봉사활동으로 협력함으로써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레지오 마리애의 두 축이며,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도와 봉사활동은 중요합니다. 두 기둥이 모두 중요하지만 특히 단원 각자의 기도생활이 잘 되지 않으면, 봉사활동도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기도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에게 가장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생활의 목적은 완덕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완덕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마태오 5,48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을 구체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말씀이며,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기도의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여러 가지 말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마음을 올리는 것이다”(성 요한 다마스체노),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이다”(성 아우구스티노, 성 예로니모), “기도는 하느님과의 친한 친구로서의 친교이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이와 같이 여러 성인들은 영적체험에서 나온 구체적인 기도의 정의를 간단하면서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기도를 잘 실천하기 위해 성경의 인물 중에서 기도의 삶을 잘 보여주셨던 아브라함을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기도가 나타난 것은 성조 아브라함부터입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보여줄 땅은 가나안 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납니다(창세 12,4). 그때 아브람의 나이는 75세입니다. 당시 아브람은 하란이라는 곳에서 신망을 얻고 있었고, 많은 재력을 가진 부자였습니다. 하란에 그냥 살았더라면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었지만,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그 말씀을 따랐습니다.

아브람의 기도는 먼저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말이 없는 아브람은 머무는 곳마다 주님께 제단을 쌓아 바쳤습니다. 여기서 나중에야 말로 표현된 아브람의 첫 기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람의 기도는 자식이 없음을 탄식하는 기도였습니다. 창세기 15,2-5의 말씀을 보면 자식이 없어서 탄식하는 아브람의 기도에 주님은 하늘의 별들처럼 후손이 많아질 것이라는 약속을 해 주십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주님과 계약을 맺게 됩니다. 창세기 17,4-8의 말씀을 보면 아브람을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되게 하고 주님은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고 계약을 맺으시면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많은 민족들의 아버지)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이러한 계약이 있은 후에 주님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아브라함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가계의 정통 혈통인 아들 이사악을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은총의 선물로 주십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실 때 “나는 너와 네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이로써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결코 파기할 수 없는 계약이 맺어졌으며, 이 관계에 충실한 것이 하느님의 본질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주님은 계약에 충실하신 분이시기에 인간의 계약 이행과는 상관없이 인간에게 충실하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계약을 어겼기 때문에 벌을 내려야겠다는 쩨쩨한 분이 아니시며, 인간의 성실이나 업적에 따라 당신의 의도를 나타내 보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때때로 하느님이 변덕스러운 존재처럼 보여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변덕스러운 분이 아니시고, 당신의 사랑을 변함없이 강력하게 관철시키는 의지의 표현이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특히 계약으로 맺어진 사랑은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최대한 정화하시고자 그에게 선물로 주신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십니다. 창세기 22,7-14에 극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이렇게 극적인 하느님의 요구에도 아브라함의 신앙은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하느님께 철저히 내어 드리는 아브라함은 ‘믿는 이들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우리 모두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시는 성부를 닮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도는 인간에게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회복시켜 주며, 또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강렬한 사랑에 참여토록 해 줍니다. 따라서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도 믿는 이들의 아버지이신 아브라함을 따라 살면 완덕의 삶으로 나갈 수 있고, 레지오 마리애의 목적에 맞는 단원으로서의 삶을 풍요롭게 가꾸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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