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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신심의 중심에 계시는 예수님

베데 맥그리거/장훈 역

레지오가 성모님께 드리는 자리가 너무 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몽포르의 루도비코 성인이 주창하는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이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비판은 대개 성모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거나,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들을 오해한 데서 비롯됩니다. 이런 반대는 매우 조잡하여 도무지 말이 되지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레지오가 예수님보다 성모님께 더 많은 관심을 준다고 말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성모님을 숭배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레지오가 후원한다고 말합니다. 성모님이 여신이라고 말합니다. 프랭크 더프 형제의 마리아론에 대하여 덜 과격하게 반대하는 이들조차도 레지오 교본에 쓰인 내용을 매우 왜곡하고 있으며, 그 결과 몽포르의 루도비코 성인의 성모신심도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성모신심이 예수님께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분의 정체성은 바로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납니다. 성모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 그리고 고통이 모두 예수님을 위한 것입니다. 성모님은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셨습니다. 전에도 자주 말했듯이 성모님께는 예수님을 향하지 않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성모님은 온전히, 자발적으로, 넘치는 기쁨으로, 당신의 아들이면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성모님께 드리는 것은 모두 즉시 우리 주님께로 가게 됩니다. 성모님은 이 성모신심의 목적이 아니고 하나의 도구입니다. 이 점에 관해 루도비코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이란,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동정녀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모님께 우리 자신을 봉헌하는 것은, 우리가 성모님을 통하여 완전히 예수님께 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께 순응하고, 그분과 일치하고, 그분에게 우리 자신을 봉헌할 때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모든 신심 중에 가장 완전한 것은 가장 완벽하게 순응하고, 가장 완벽하게 그분과 일치하고, 가장 완벽하게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예수님을 가장 잘 따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거룩한 어머니께 드리는 신심이 곧 주님께 가장 잘 순응하고, 그분께 우리 영혼을 가장 완전하게 봉헌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성모님께 더 많이 봉헌하면 할수록 그것은 모두 예수님께 봉헌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를 온전히 봉헌한다는 것은,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동정녀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게 제가 말하는 성모신심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 레지오 단원들이 온전히 성모님께 의지하여 사는 것, 그리고 완전히 성모님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주님과 참 우정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영혼의 구원을 위한 사도직 활동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지오 교본에서 보듯이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성모님을 통하여 우리가 주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성모님 없이 예수님을 완전하게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러 위대한 성인들이 다음과 같은 라틴어로 된 가르침을 전해 주었습니다. “Numquam satis de Maria” 우리가 아무리 성모님을 찬양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참으로 맞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모님을 사랑해도 부족하고, 성모님과 함께 성모님을 위해서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다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반드시 그리스도론적인 맥락에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의 삶,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모두 성모님께 드립니다. 성모님을 통해 성모님에 의해서, 모든 것이 가장 순수하게, 풍요롭게 그리고 더욱 깊어진 채로 우리 주님께로 전달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현대 신학자 한 분의 말을 인용하면서 훈화를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사랑과 우리 자신을 성모님께 봉헌할 때, 이 봉헌은 성모님에게서 그쳐 버리는 게 아닙니다. 성모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면, 그것은 그리스도 그분께 드리는 봉헌이 됩니다.” 루도비코 성인이 말했듯이, 성모님을 위해 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드리는 섬김의 마지막 목적지가 성모님이 아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최종 목적지에 버금가는 분입니다. 또한 성모님은 신비한 방법으로 우리를 도와주시며, 우리가 주님께로 쉽게 나아가도록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십니다.

대부분의 레지오 단원들은 이 훈화에서 말씀드린 중요한 원칙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가톨릭 신자와 비신자들이 우리가 성모님께 드리는 사랑과 신심에서, 예수님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 사람들은 레지오를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성모님의 정체성과 역할도 크게 오해받고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잡아서 성모님과의 참된 관계를 증진시키고, 우리 주님과의 관계를 참되게 하는 것은 우리 레지오 단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성모성월을 맞이하며

박순신 프란치스코하비에르

어느 시골에 홀로 가난하게 늙어 가시는 외로운 어머니, 아니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착한 이웃들이 자원봉사로 가사도우미가 되어 드렸지만, 본인 신상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춥고 배고프고 외로운 자에게 벗이 되어 주라는 말씀을 따르는 신자들이 말없이 머리 잘라드리고 목욕시켜드리고 때때로 밥을 챙겨드리며 말동무가 되어드렸는데, 때가 되어 어느 날 노환으로 쓸쓸하게 운명하셨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봉성체를 하시면서 하느님나라와 인연을 맺고 사셨기에 장례미사로 보내드리는데, 까만 양복을 입은 신사가 까만 차를 타고 가족인 듯한 사람들을 대동하고 나타났습니다. 아들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갑자기 가슴이 메어지는 서러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사연이야 있었겠지만, 왠지 야속하고 허전하리만치 슬펐습니다. 잘난 아들의 고결한(?) 품위를 지켜주시느라 끝내 말없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리면서 우리는 “신은 언제 어디에나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유대 격언을 기억하였답니다. 그리고 또 한 분의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습니다. 스물 세 살의 처녀 가사도우미가 독거노인인 할머니를 돌보다가 할머니가 외롭게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지 열흘쯤 지나서 미국에 살던 할머니의 아들이 직장으로 찾아와 도우미 앞에 무릎을 꿇고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라며 펑펑 울더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도우미는 글의 말미에서 할머니를 통하여 인간을 용서하고, 인간과 함께 슬퍼하는 자비로운 신의 섭리를 깨닫게 된 것이 할머니가 남겨주신 선물이라 했습니다(좋은 소식 2009년 4월호 106쪽). 여인들이여, 그대들이 어머니일 수 있어 더욱 위대합니다.

맑은 하늘 오월은 어머님의 달, 성모성월의 문을 열면서 가톨릭 신앙인들의 어머니이신 천주의 성모 마리아 앞에 무릎을 꿇고 어머니! 하고 다시 불러봅니다. 눈을 감고 묵상으로 마음 밭에 들어섭니다. 수많은 레지오 단체의 명칭들이 모두 마리아에게 붙여지는 존칭일진대 신격화시키는 우를 범하지만 않는다면, 마리아 신심의 얼마나 아름다움 표현인가 하고 감탄합니다.

그러나나 레지오 단원 여러분! 교회의 공식적인 전례축일로 지내면서 마리아에게 붙여지는 명칭들, 즉 천주의 모친이라 불리시는 분, 천사의 영보領報를 전해 들으신 분, 유일하게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 몽소승천하신 분 등의 신학적 용어들을 여러분은 아무 반응 없이 넉넉히 이해하면서 믿고 받아들이십니까? 이성적으로는 갸우뚱하지만 신앙으로 채색하여도 반신반의하게 만드는 말이지만, 신앙의 신비여! 그 한마디를 정답이라 생각하고 순종으로 믿는 거지요?! 그렇다고 말해도 괜찮습니다. 그냥 믿는 여러분이 행복합니다. 공부 많이 하고 돈 많이 벌고 귀족 집 딸이나 아들과 혼인하여 귀족가문에 들고 출세하여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 중에는 자식 뒷바라지 하느라 등골이 휘고 볼품없이 초라하게 늙어가시는 무식한(?) 부모님을 부끄러워할지도 모르지만,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시자 성전 휘장 한 가운데가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지고(마르 15,38;루카 25,45),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며(마태 27,51,) 캄캄해진 하늘에서 소낙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가운데 처참하게 죽은 아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유난히 서럽게 대성통곡하던 마리아!...그분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며 살아가는 여러분은 행복하십니다. 아무 이유 없이 그분이 예수님의 어머니셨기에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여 주님으로 믿으며 사는 신앙인에게는 그 여인이 주님의 어머니이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최고의 존경으로 받들어 모실 수 있는 것이니, 마땅히 존경과 사랑을 받으셔야할 어머니 마리아시여!

레지오 단원 여러분! 여기서 잠깐 여러분의 믿음의 여유를 믿고 교회가 공식적으로는 가르쳐주기를 꺼려하였지만 또 하나의 전승으로 알려진 마리아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 하나 귓속말로 속삭여 볼까요?

다윗 가문인 마리아의 아버지는 갈릴레아 나자렛 사람 요아킴이었고 어머니는 베틀레헴 사람 안나였는데, 이 부부는 늙은 나이에도 아이가 없자 하느님께 청원기도를 바치면서 자녀를 허락한다면 주님의 봉사에 그 자녀를 바치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주의 천사가 요아킴과 안나에게 각각 나타나 하느님께서 딸을 허락하셨다고 알려주면서 아기의 이름을 마리아라 부르라고 합니다. 드디어 마리아가 태어났고, 3살까지는 아버지의 집에 머물다가 3살이 되어 젖을 뗀 후에는 당시 법에 따라 부모가 봉헌물과 함께 아기를 성전에 데려가서 봉헌하니, 아기는 봉헌된 또래 아이들과 분별연령이 될 때까지 성전에서 키워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드디어 14살이 되었을 때, 성전에 거주하며 봉사하는 처녀 가운데 나이가 찬 경우에는 누구나 집에 돌아가서 성숙한 나이에 이른 만큼 나라의 관습에 따라서 결혼하려고 노력하라는 대사제의 명이 떨어졌는데, 마리아는 지시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 자신과 부모가 마리아를 주님의 봉사에 바쳤기 때문이라는 이유였습니다. 맹세를 풀어준다는 것은 맹세를 하였으면 갚으라는 성서의 기록을 위반하는 것이고, 그렇다고 새로운 관습을 만들 수도 없어서, 대사제는 예루살렘과 인근의 주요 지도자들을 축제일에 모이게 하여 주님의 뜻을 물어보기로 하였습니다. 주요지도자들이 기도하는 동안 대사제가 주님께 의견을 구하니 계약의 상자와 자비의 의자에서 목소리가 울려나오길 처녀가 누구에게 주어져 약혼을 할 것인지에 관해 이사야 예언서를 찾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보니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이사 11,1-2)라는 말씀이 찾아졌습니다. 그래서 다윗 가문에 속하며 결혼 연령에 이른 미혼인 남자는 모두 자기 지팡이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대사제는 지팡이가 모인 뒤 어느 지팡이든 거기서 꽃이 피고 그 위에 주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되는 경우 그 사람에게 처녀가 주어져 약혼해야만 한다고 말했고, 지팡이를 모아놓고 기도하니, 나이 많은 요셉의 지팡이가 뽑혔습니다. 하여 관례대로 약혼 예식을 마친 요셉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 결혼에 필요한 가구 집기를 준비하였고, 마리아는 갈릴래아에 있는 부모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마리아에게 발현하여 성령의 힘으로 처녀로 머문 채 죄 없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을 알려주고,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합니다. 시간이 흘러 약혼한지 3개월이 지나자 요셉은 결혼을 위해 갈릴래아로 마리아를 찾아가서 만나보니 이미 마리아가 임신한 상태인지라, 의롭고 경건한 사람인 요셉은 처녀의 임신을 폭로하거나 창녀의 혐의를 씌워 망신시키지 않고 조용히 파혼하려고 마음먹었으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자초지종을 알려주니 요셉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마리아가 임신 9개월이 가까이 되었을 때 요셉은 필요한 물건을 챙겨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갔는데, 마리아는 동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The Other Bible: 지성소의 마리아, 마리아의 탄생에 관한 복음 중에서 발췌) 신비적인 요소가 담뿍 담겨있지만, 마태오복음이나 루카복음이 전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아니합니다.

신앙은 어려운 신학용어의 논증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러기에 더욱이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기 직전,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를 사랑하던 제자 요한에게 맡기시며 어머니로 모실 것을 당부하셨고,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과 교회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들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로 모셔왔기에 거룩한 신앙을 물려받은 후손들이 한결같이 그분을 어머니로 모시며 공경하는 것은 당연하고 복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거룩한 어머니들의 자애로운 표상을 기억하면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야말로 참으로 우리가 마땅히 공경해야할 어머님이심을 확인하는 시간이 성모성월이 됨을 기쁘게 생각하면서, 함께 묵주알을 굴립시다.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원주 Re. 지도신부




예수님을 따르려면....

한만옥 토마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인 것 같다. 특히 요즘처럼 바쁘고 여러 가지 유혹도 많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더욱 그렇다.

어느 날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하고 말씀드린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하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따르겠다는 율법학자의 용기와 뜻이 가상하여 받아주실 수도 있으련만, 그 가상한 뜻이 한낱 감상적인 것이라면 어림없는 일이고 설사 굳은 결심을 했다고 해도 결코 쉽지 않은 길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라 생각한다(루카 9,57-58 참조).

우리에게 거주할 집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집이 크든 작든 들어가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을 때 노숙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정말이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노숙을 하고 계시는 분들을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도 공생활 3년을 노숙자처럼 생활하셨다. 그분은 집도 절도 없이 제자들과 함께 떠돌아다니시면서 가난과 질병으로, 혹은 소외감으로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로하고 치유해 주셨다. 복음서 어디를 봐도 한곳에 안주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가 없다.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 골고타 언덕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여정을 계속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하신 말씀 그대로 사셨다. 그런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결국은 십자가 죽음에까지 함께 하는 것이 바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자세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나는 가끔 교우들에게서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주님 말씀대로만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자조적인 말을 듣는다. 사실 나도 동감한다. 그러나 우리 안에 주님을 따르려는 마음이 얼마나 절박하게 자리 잡고 있는가? 그보다 세상일에 더 마음쓰고 세상의 유혹에 마음이 빼앗긴 상태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깊이 성찰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신앙은 결단이다. 하느님과 세속적인 것 사이에서 늘 갈등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지만 그래도 단호하게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는 결단을 통하여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 나아가는 것이다. 하느님은 때로 너무 멀게만 느껴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 힘들고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세속적인 것은 피부로 느껴지고 늘 우리 주위에서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순간의 안락함과 달콤함을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순간의 선택이 10년이 아니라 영원을 좌우하는 것이다. 어차피 세례를 통해서 신자가 된 우리는 모든 것에 우선해서 주님을 선택하고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며 그분을 성실히 따름으로써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의정부 Re. 지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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