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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4 15:27

4월호 월간지 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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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ocutio - January, 2010

기본으로 돌아갑시다(3)

비드 맥그리거/하성환 역


주회합

작년 11월에 열린 꼰칠리움 간부회의에서 올해 계획을 협의하며, 전 세계 레지오의 본질적인 쇄신을 이루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레지오의 정신과 레지오 관리의 기본으로 다시 돌아가야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 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레지오의 선서문을 첫 번째 주제로 삼아 훈화(2009년 11월)를 하였습니다. 레지오 단원들이 그들 각자의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셔오고 레지오가 언제 어디서나 완전히 그리스도 중심적인 마음가짐을 확실히 하겠다는 목적으로, 성령과 성모님께 선서한 내용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성령과 성모님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오셨으므로 레지오 단원들도 그 친밀한 상호 협력 관계에 동참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제 상훈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쁘레시디움의 단장은 매월 첫 번째 회합에서 기도하듯이 엄숙하게 상훈을 낭독해야만 합니다. 상훈의 첫 번째 의무는 어찌 보면 너무나 현실적이고 놀라우리만큼 단순하여 감화조차 줄 수 없을 것 같지만, 그 의무는 개인의 성화를 위한 무한한 가능성과 사도직의 결실을 얻을 수 있는 엄청난 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단원이 지켜야 할 레지오의 의무는: 첫째, 쁘레시디움 주회합에 규칙적으로 정각에 출석하여, 자신이 한 활동에 대하여 알맞고 또렷한 보고를 한다.”

이 의무를 생각해보면 ‘왜 교본이나 프랭크 더프는 그의 일생을 통해 쁘레시디움의 주회합을 그렇게 강조했을까?’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교본은 이에 대해 주회합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주회합은 레지오의 심장이며, 이곳으로부터 생명의 피가 모든 동맥과 정맥의 혈관으로 흘러 들어간다. 주회합은 레지오를 밝히는 전력과 동력을 생산하는 발전소이며, 레지오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제공해 주는 보화의 곳간이다. 주회합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단원들과 더불어 앉아 계시는 위대한 공동체의 수련 도장이며, 주회합을 통해 그분은 우리의 활동에 필요한 독특한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 또한 각 단원은 쁘레시디움 주회합을 통하여 절제된 신앙정신이 몸에 배게 되어, 우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개인 성화에 힘쓴다. (...)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들은 주회합에 참석하는 일이 레지오의 으뜸가는 의무이며 가장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 주회합 참석의 의무는 무엇으로도 대신 채울 수가 없다. 주회합 참석에 소홀한 단원들의 활동은 마치 영혼이 없는 육체와 같다. 이 으뜸가는 의무를 게을리하게 되면 어떠한 활동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고 곧 레지오 대열에서 탈락하고 만다는 사실은 이치로 보아도 그렇고 이미 경험상으로도 잘 드러나 있다.” 정말이지 너무나 뛰어난 대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도 ‘왜 모든 레지오 단원의 으뜸가는 의무가 주회합에 참석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남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쁘레시디움은 그리스도 신비체의 작은 방입니다. 우리는 그 곳에서 그리스도 신비체 안에 살아 계시고 활동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 곳에 그분의 이름으로 두세 명만 모여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한 가운데에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혼을 구원하는 사업의 한 부분을 맡기 위해 주님께 기도하고 그분과 함께 계획을 세웁니다. 레지오의 회합은 세속적인 목표나 정신을 지향하는 기업의 이사회나 다른 종류의 순전히 세속적인 위원회의 회의와는 같지 않습니다. 레지오의 회합은 기본적으로 항상 그리스도 신비체의 작은 방에서의 회합이 되어야 하며 이것이 회합의 본질적인 정신입니다. 즉, 그 회합의 궁극적인 목표는 언제나 영혼의 구원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레지오는 항상 영원을 생각하며 영혼들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즐길 수 있도록 전 레지오 단원들과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조직이나 단체는 칭찬받을 만하고 중요하기는 하지만 육체만을 구원하려는 목표나 정치적인 목표를 지향하는 반면에, 레지오는 건전한 영혼의 영원한 삶에 확고히 초점을 맞춥니다.

쁘레시디움은 예수님 신비체의 한 방이므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특별히 그곳에 현존하십니다. 또 쁘레시디움 회합에는 성모님이 특별히 함께 계시고 성모님은 신비체의 어머니이시므로 우리가 그 신비체의 방을 갖고 있다면 성모님은 그 방이 어디에 있든 그곳에 특별히 나타나셔서 레지오 단원들을 어머니로서 보살펴 주시고 또 활동도 같이 하십니다. 이렇게 쁘레시디움 회합에 예수님과 성모님이 함께 하신다는 두 가지 진실과 그에 대한 확신은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본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득력 있게 설명해 줍니다. “교회의 공동체적 사도직은 성모님이 그것을 당신의 모성과 결합하여 어머니로서 보살펴 주심에 의해 유지된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생명 자체를 세상에 낳아 주셨고, 하느님에게서 이 위대한 임무에 맞갖은 은혜를 받았다.’(교회 56) 성모님은 당신께 기꺼이 협력하고자 하는 신자들의 봉사 활동을 통하여 당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계속 수행하신다. 쁘레시디움은 성모님의 임무를 돕고자 열망하는 한 무리의 사랑스런 영혼들을 성모님이 쓰시도록 맡겨 드리고 있다. 그리고 성모님이 쁘레시디움 단원들의 협력을 받아들이고 계심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모님이 쁘레시디움을 통하여 당신의 특별한 은총을 보여 주시고 당신의 모성을 새롭게 드러내고 계시므로, 쁘레시디움이 있는 곳에 성모님도 함께 계신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이념에 충실한 쁘레시디움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과 쇄신, 치유와 문제의 해결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레지오는 문제가 있는 곳에 반드시 이 영신적 원리를 활용해야 할 것이다.”(교본 19,23) 따라서 저는 주회합에 충실한 것이 루도비코-마리아 성인의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의 핵심적인 원리를 실천하는 매우 실제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쁘레시디움 회합은 성령이 강림하신 예루살렘의 다락방이 재현되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주위에 둘러앉은 제자들의 무리가 성모님과 함께 성령을 받아 모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모님의 선교 사명을 위해 가장 절박하고 진정으로 영성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어느 곳이든지 파견됩니다. 그러므로 레지오 회합에는 은총과 환희, 그리고 사도직 열정을 가지고 참석해야 하며 반드시 성령강림을 경험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기본으로 돌아가려는 우리의 노력 중에 교리적인 측면에서 주회합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번 훈화는 실제적으로 쁘레시디움 회합의 세세한 사항들이 어떻게 레지오와 단원들 각자에게 커다란 은총과 영적 성장의 원천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만 하는지를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십자가의 다스림

이형수 몬시뇰

사순시기를 지나 부활을 바라보면서 새삼 그리스도인의 본질인 십자가에 대해 묵상해본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모든 신앙인들은 위 성경 말씀을 신자생활의 핵심으로 이해하면서 살아간다. 분명 십자가는 구원의 표지이자 예수님의 제자됨을 드러내는 표지이다. 인류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은 왜 하필이면 십자가라는 고통의 극치를 가실 수밖에 없으셨을까 하고 깊이 묵상해본다.

흔히 말하기를 하느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믿는다. 그런데 그 말의 참 의미가 무엇일까? 무無란 얼핏 보기엔 존재치 않음, 허무함, 죽음, 무가치함, 무식함, 무력함, 가난함 등을 연상시키는 말일 것이다. 거기에 비해 유有는 존재함, 살아 움직임, 충만함, 유력함, 가치로움, 유식함, 부유함 등을 연상시키는 말이겠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유와 무 사이에 드러나는 그러한 대조적인 개념이 전혀 존재치 않는다. 오히려 하느님은 마치 공기처럼 없어 보이나 충만히 계시고 텅 빈 창공처럼 허무해 보이나 그 안에 만물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넓디넓은 여백이 되어 주시며, 한줌 흙처럼 무가치해 보이나 그 속에 고귀한 생명들을 품으시는 등 ‘없음’ 속에 한없이 풍요롭게 ‘있음’을 지니시는 분이시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허무와 어리석음의 극치인 십자가, 그 십자가 안에 전 인류를 구원할 하느님의 힘이 들어있다는 역설적 진리 안에 우리 신앙의 핵심이 뿌리를 박고 있다. 그 자체로 보아서는 보잘것없고 죄 많고 그래서 인간의 이치대로라면 허무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그 인간을 이해할 수 없는 십자가의 무한하신 자비로 치유하시고 다시 살리시어 영원히 당신 품안에 끌어안으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역시 역설적이기만 하다. 작고 비천하고 허무한 가운데에서 끝없이 새로움과 신비스런 생명을 이끌어내시는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그윽한 자비, 이것이 십자가 안에 담긴 주님 사랑의 메시지일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수난 전날 저녁 제자들과의 만찬상에서 자신의 몸과 피를 음식으로 내어 주시어 인류를 영원히 살게 하셨다. 교회는 이천년 동안 예수님의 분부에 따라 미사성제를 통해 그분의 살과 피를 받아먹고 그분과 일치하며 영생을 보장받는다. 자신의 몸과 피를 음식으로 내어주심과 처참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랑의 극치를 가신 예수님은 마침내 영광스럽게 부활하시어 결정적으로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왕이 되셨다. 그런데 그분의 왕으로서의 다스림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모습이 결코 아니다. 왕이란 분명 지배하고 군림하는 인상을 주는 낱말이다. 막강한 지위와 권력, 무력과 금력, 학식과 품위, 위용과 인기로 뭇 백성들 위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세인들이 미처 몰라보는 또 다른 왕이 있다. 누구일까? … 내가 밥을 먹는다. 밥은 나에게 먹힌다. 언뜻 보면 내가 밥을 지배하는 것 같다. 하지만 밥 없이는 못 사는 나, 밥 없이는 목숨을 이어갈 수 없는 나, 그래서 나는 밥에게 종속되어 있다. 즉 밥이 나를 지배한 것이다. 밥은 곧 나의 왕이다. 성체로 내게 밥이 되어 주신 예수님, 그리하여 나를 영원히 살리신 예수님, 그래서 그분은 왕이시다.

기워 갚을 길 없는 우리의 크고 많은 죄악들, 그로 인해 멸망과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을 하느님이신 그분이 몸소 십자가의 완전한 속죄 제물이 되시어 우리를 영생으로 살리셨으니 그분은 왕이시다. 이렇듯 그분의 왕으로서의 다스림은 잡아먹히고 끝까지 져주고 깡그리 희생당하는 모습으로 펼쳐진다. 힘과 이기욕의 논리로 펼쳐지는 세상 안에서 밥이 되어 먹히시는 예수님의 길만이 아픔과 상처투성이인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비결임을 우리는 신앙으로 믿고 그 길을 따른다. 그 길은 필경 순교의 길이다. 그러나 무한 능력이신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두려워하지 않는다. 십자가의 제사를 재현하는 미사성제에서 매일 모시는 성체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먹히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랑의 극치로서, ‘신앙의 신비’이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 5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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