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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2 10:09

9월 마리애지 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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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ocutio - June, 2010

비밀 엄수
비드 맥그리거/ 하성환 역

상훈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항목은 레지오 조직의 비밀 엄수에 관한 것입니다. 레지오 안에서나 밖에서도 비밀을 지키는 것은 레지오 창설자인 프랭크 더프의 두드러진 특징이었습니다. 주교나 사제, 남녀 수도자 및 모든 분야의 평신도들이 그를 신뢰했고 게다가 또 그들에게 마음을 다해 세세히 공감하며 들어주는 그가 그들의 가장 감춰두고 싶은 비밀과 관심사에 대해서도 믿을만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비밀 엄수 정신은 사람들의 존엄성에 대한 절대적인 존중과 진정한 우정을 맺으려는 욕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온전한 사도직과 영향력은 그와 자신들의 삶까지도 공유하는 사람들로부터 들은 정보의 내밀한 본질을 존중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을 완전히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정말이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교본에 매우 강도있게 이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매달 한 차례씩 되풀이해서 단원들에게 들려주는 상훈은 레지오 조직에서 비밀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주고 있다. 군인은 용기가 부족하면 부끄러운 일로 여기지만, 쁘레시디움 회합에서 알게 된 사실을 외부에 퍼뜨리는 것은 레지오에 대한 반역 행위이다.”(19장 20항) 비밀 엄수의 중요성을 이해하기에 가장 쉬운 방법은 우리가 친구에게 신뢰를 가지고 어떤 사실을 이야기했는데, 우리가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3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에 어떤 느낌을 가졌었는지를 기억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친구에 대한 믿음은 사라지고 우정도 깨졌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적어도 그런 사람과 다시는 중요한 사실을 공유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본에서 레지오는 가족과 비슷하며 레지오에서의 보고는 가족들이 집안의 비밀을 의논하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족 간의 사사로운 이해관계는 가족 이외의 외부에는 알리지 않습니다. 비밀스러운 사항들이 새어 나감으로써 믿음이 부족해진다면 그 쁘레시디움은 조만간에 붕괴될 것입니다. 단원들이 쁘레시디움 회합에서 발언하기를 꺼리게 되어 문제가 생겨도 그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거나 논의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레지오에서 이러한 문제로 잘못되었던 상황은 없었지만 이 분야에서의 인간의 본성은 매우 약하기 때문에 계속하여 주의를 줄 필요가 있습니다. 레지오 단원에게 있을 수 있는 최악의 폐단은 남의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는 평판을 받는 경우일 것입니다. 그러나 비밀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인다면 정말로 나쁜 상황이 됩니다. 교본은 그러한 사람들은 영혼이나 사도직 활동에 손실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의무마저 배반하는 단원이 다시는 생겨나지 않도록 노력하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드물지만 레지오 단원이 비밀을 지켜야만 되는지 아닌지로 혼란을 겪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런 때 교본은 즉시 영적 지도자(만날 수 없을 때는 다른 능력 있는 분)와 의논하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비밀 엄수에 관해 말하자면 이 훈화를 아무리 길게 하더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다른 사항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례로 우리는 레지오 단원의 비밀 엄수 이행과 의사, 상담 전문가, 변호사, 언론인이나 그 밖의 다른 많은 사람들의 비밀 엄수 이행에 대해 비교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본은 이 주제에 대해 필요한 모든 기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많이 생기더라도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본을 자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레지오 단원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우리가 레지오 활동 중에 만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성모님께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이름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비밀을 지키지 못하면 결국 어느 정도라도 성모님을 배신하는 것이며, 성모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모님의 이름을 더럽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정신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이 비밀 엄수에 있어서도 우리의 모범이며 또 감화를 시켜 주십니다. 성모님을 향하여 성모님의 판단력을 공유하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우리의 사도직 활동 중에서나 모든 회합 중에 만나는 사람들의 비밀을 존중하도록 합시다.


‘댓길이 대’자를 버릴 수만 있다면
하성호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좋다’는 마음의 표현으로 ‘댓길이’(대길大吉)라는 말을 일상 안에 흔하게 사용하였다. 그 당시 어떤 분이 ‘댓길이 대자’를 금金자와 여女자와 력力자를 합쳐서 자신이 만들었다며 자랑을 하였는데, 그럴듯하였다. 물론 한문 옥편에 나오는 글자는 아니다.
‘댓길이 대’자는 현대인의 생활태도를 너무나 잘 요약하는 글자이다. 돈(재물)이 많아야 하고, 많은 쾌락을 누려야 하고, 많은 권력을 가진다면 이보다 더 나은 삶이 어디 있느냐고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들을 획득하려 한다. 윤리도덕은 뒷전이고, 최소한의 양심의 소리마저도 외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댓길이 대’를 불철주야 추구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사는 세상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하느님을 찾기보다 귀찮은 존재로 여기는 하느님과 멀어진 세상, 이웃을 삶의 동반자로 받아들이기보다 경쟁과 경계의 대상으로 여기는 세상으로 변질되지는 않았는가? 자신의 이기적인 탐욕에 빠진 생활을 추구하다보니까 결국은 자기 자신마저도 망가뜨리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물론 탐욕으로 인한 인간의 타락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구약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구약의 백성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보속으로 기도를 하였고, 망가진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보속으로 자선을 베풀었으며. 망가진 자신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보속으로 단식을 하였다. 마태오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기도와 자선과 단식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하느님과 이웃과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신약의 백성에도 중요함을 일깨워주셨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댓길이 대’자가 자칫 멸망의 길로 이끄는 지름길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을 이제 우리도 깨달아야 하겠다. 이 세상적인 군림의 탄탄대로를 굳게 믿으며 메시아시대를 꿈꾸던 시몬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라시며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댓길이 대’를 하느님보다 더 먼저, 더 많이 추구하는 우리들에게 내리는 호통이라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겠다.

사도 바오로께서도 “여러분 안에 있는....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이것들 때문에 하느님의 진노가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립니다”(콜로 3,5-6)라고 말씀하시고, 다른 서간에서는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10)라고도 말씀하셨다.
이제 우리가 지금껏 길들여진 세상에서 돌아서야 한다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댓길이 대’자는 우리를 죽음과 멸망의 길로 재촉할 수 있다는 것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자기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시켜야 한다. 그동안 길들여진 생활 태도와 생활습성을 바꾼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못 바꿀 것도 없지 않겠는가!
내가 빨간색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면 온통 빨갛게 보이고, 노란색 안경을 끼고 바라보면 세상이 온통 노랗게 보인다. 그리스도의 색을 끼고 보면 세상은 온통 그리스도로 보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의 말씀이 새삼 우리 마음에 깊이 새겨지는 삶을 살자.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칠 때 우리의 생활은 신바람날 것이다. 세상 것을 그리스도보다 더 소중히 여기면서 어찌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랑할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현실임을 부인할 수도 없지 않은가?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격언도 있으니까, 한 걸음부터 시작하는 용기를 가지면 좋겠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김용남

사랑하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 여러분!
교회 안에서 많이 수고하시고 희생하시는 여러분의 사랑과 봉사에 감사드립니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변하면 세상에는 혼란이 옵니다. 세상에서 변하지 말아야 할 가장 귀한 것,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이 막히지 않고 흘러야 하는 게 아닐까요? 정은 자연생명이고 사람이며 마음을 타고 물과 같이 흐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흐르지 못하고 고이면 썩어버리거나 파괴적인 힘으로 변합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의 수많은 청소년들과 고령인구들은 일을 하지 못해서 열병을 앓고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과중한 업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편중된 상태입니다. 거기다가 전체 임금노동자에서 비정규직 비중이 절반이 넘고 그 임금도 정규직의 절반 수준이며, 청년실업률은 8%에 이르고 ‘사오정’, ‘오륙도’가 말해주듯 중장년층도 고용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현 정부의 부자세금 줄이기와 대기업 중심의 경제로 인해 300인 이상 기업의 20대 고용비중은 2008년 23%에서 2010년 19.6%로 줄고 사회 경제적 양극화 심화로 가계부채 증가, 자영업 감소, 비정규직 증가, 물가인상, 집값 하락 등 서민경제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고 있으나 정책기조 변화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4대강 사업 등 불요불급한 사회간접자본 시설 사업을 중단하고, 그 예산으로 저출산 고령화 해소를 위한 아동보육시설 지원, 기초노령연금확대, 학교상담 도우미, 간병도우미 등 지속가능한 일자리 창출 사업에 투입해야 합니다.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민심을 수용한 친서민 실용정책으로는, 지속 가능한 일자리 창출(사회적 기업육성, 공공기관의 비정규직 정규직화) 친환경 무상급식(4대강 중단으로 예산 우선 배정), 무상보육 전면실시와 취약계층 지원(만5세 전면 무상보육과 기초노령연금 대상자 및 금액 확대), 대형마트(SSM) 규제법안 신속 처리 등 영세상인 권리보호 등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현재 국내경제나 국제경제 상황이 상당히 심각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IMF때보다 서민들은 더 어렵다고들 합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에서 국민 각자가 국가 전체의 명운을 결정짓는 초석임을 잊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을 개혁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모든 악으로부터 해방되어 새 사람이 되어야만 사회의 구조적인 개혁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개혁, 내면적인 자기 변화가 없이는 우리는 그 어떤 일도 해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완전히 인간이 되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그가 하는 행위에 의해 인간이 되어갈 수도 있고 또 비인간적으로 타락할 수도 있습니다. 즉 인간다운 행위에 의해서 점차 인간으로 형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참다운 인간적인 행위란 나누어 가질 줄 아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자기 것”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태어날 때 빈손으로 태어났고 죽을 때 빈손으로 떠납니다. 인간이 홀로 살 수 없고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은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나눌 때 그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더 풍성해지는 것이 곧 나눔의 신비인 것입니다. 요즈음처럼 어려운 때, 매일 먹고 마시고 일하며 즐거운 잠도 잘 자는 우리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 즉 굶는 사람, 목마른 사람, 실직자, 고통 중에 있는 사람, 불면증에 걸릴 정도로 힘겹고 어렵게 살아가는 처지의 사람들을 깊이 생각해 봅시다. 자신만을 아끼고 사랑하는 일은 짐승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자신이 스스로 남을 위한 음식이 되어야 하고, 생명을 나누어야 합니다. 나눔은 아픔과 고통, 희생과 헌신을 수반하지 않고는 진정한 나눔이 될 수 없습니다. 쓰고 남는 것, 나에게 별로 필요 없는 것을 나누는 것은 진정한 나눔이 아닙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특성, 그것이 재물이건, 시간이건, 봉사이건, 그 어떤 것이라도 비단 그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 하찮게 보이는 사소한 말 한마디, 사소한 행동 하나라도 자신의 희생을 동반하여 이루어지는 나눔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나눔이요 그러한 나눔이 실천될 때 우리 사회는 조금씩 바뀌게 될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은 목적 없이 살아가도 될 만큼 길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쁘게 움직여도 실제로는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삶 속에서 어떤 기쁨과 보람을 맛볼 때만이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 여러분!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대전교구 탄방동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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