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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06 13:10

월간지 9월호 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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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알피 램


올해는 하느님의 종 알피 램 형제가 선종한 지 50주년 되는 해입니다. 저는 레지오의 전 세계 최고 상급기관인 콘칠리움의 지도신부로서, 알피 램 형제의 생애에 대해서 그리고 형제와 전 세계 레지오와의 관계에 대해서 몇 가지 소견을 얘기하는 것이 제 의무이며 동시에 특권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아일랜드나 그가 친선대사로 활동한 남미 대륙의 알피 램일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아시아, 특히 유럽 - 신앙을 잃어버리고, 그 결과 수백만의 사람들이 도덕적인 삶도 잃어버린 대륙 - 여러 나라들의 알피 램이기도 합니다. 힐다 퍼틀Hilda Firtel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는 자신이 활동한 남미 대륙만을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의 관심은 전 세계였으며, 그는 뜨거운 사도적 열정으로 전 세계를 품에 안았다.” 알피 램 형제는, 다른 성실한 단원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구분짓는 모든 것 - 언어, 문화, 피부색, 인종, 역사적인 관계 또는 종교 등등 - 을 초월하고자 애썼습니다. 그는 성모님의 눈과 마음으로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안에서 우리 주님을 뵙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레지오의 사랑과 관심에서 한 사람도 배제시킬 수 없었습니다.


알피 램 형제는 문서로 남긴 것이 매우 적지만, 그가 남긴 글들은 자기 자신과 레지오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저를 강하게 사로잡은 것 몇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나는 정말 매우 약하다. 그러나 나는 성모님께서 이 약함을 이용하여 당신의 힘을 보여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얼마 전부터 날마다 미사 끝 무렵에 레지오 선서를 암송하고 있다. 레지오 선서는 한 줄 한 줄마다 약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모두 레지오에 가입할 때 레지오 선서를 합니다. 그러나 이 선서가 우리의 내적 삶 속에서 우리가 숨쉬는 바로 그 환경이 되도록, 우리가 자주 레지오 선서로 기도드린다면 더 좋지 않을까요? 레지오 선서는 레지오 영성의 토대가 되는 모든 기본적인 교리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알피 램 형제의 삶과 거룩함의 비밀은 바로 이 선서를 철저하게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레지오를 생활화 하자living the Legion’ 는 표현은 그의 편지에서 가장 자주 나타나는 문구 중 하나입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레지오를 생활화하는 것이 바로 성모님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레지오에 더욱 투신할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이 더욱 더 성모님 안에 머무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알피 램 형제가 말하는 레지오의 생활화는 바로 교본의 생활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교본의 정신과 그 내용을 자신의 내적 외적 삶에 적용하려 늘 노력했으며, 자신의 삶을 통하여 그것을 실천하였습니다. 바로 이 교본의 생활화로 그는 하느님의 종이 되었으며, 언젠가 그가 성인품에 오르게 되면 이것이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입니다.


레지오가 성장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레지오가 성장함으로써 우리가 성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필요 없습니다. 물론 레지오 활동을 통하여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레지오 단원들이 먼저 참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레지오 교본은 성화나 선교 그리고 복음화라는 보편적인 부르심을 담고 있습니다.


알피 램 형제의 사도직에서 두드러진 것은, 그가 ‘연장 활동Extension Work’을 하고, 도제제도를 활용하여 다른 사람들이 신앙을 갖고 사도직 활동을 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열여덟 젊은 나이에 알피 램 형제는 절친한 친구 그레이스의 후원과 격려를 받으며, Kilalla, Kerry, Waterford, Raphoe, Kilmore 등의 시골 교구에서 연장 활동의 기술을 익혔습니다. 그는 또한 더블린에 있는 몰락한 사람들을 위한 ‘샛별 호스텔’에서 일했습니다. 그곳은 분명 자신을 성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학교 중 하나일 것입니다. 샛별 호스텔은 수많은 특출한 레지오 단원들을 배출해낸 곳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버티어 내기 위해서는 성모님의 마음으로, 그곳에 사는 보잘것없는 사람들 안에서 예수님을 뵙고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것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연장 활동을 하거나 샛별 호스텔에서 일하려는 사람이 누구나 알피 램 형제를 수호성인 중 한 분으로 삼으면 일을 잘 해나갈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알피 램 형제는 그런 일을 꿰뚫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알피 램 형제가 남미에서 친선대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잘 준비시키셨으며, 그는 하느님께 훌륭하게 응답하였습니다. 남미에서의 그의 영향은 널리 깊게 지속되었습니다. 그가 행한 모든 외적인 활동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고, 그의 내적 동기나 초자연적인 믿음을 등한시하기는 쉽습니다. 그는 레지오 쁘레또리움 단원이었으며, 그래서 그는 매일 미사참례하고 영성체를 하고, 교회가 공인한 성무일도 기도를 매일 바치고, 모든 레지오 기도 특히 로사리오 기도와 마니피캇을 매일 바쳤습니다. 또한 활동 단원의 가장 중요한 의무인, 매주 두 시간의 사도직 활동을 성실히 수행하고, 쁘레시디움 주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알피 램 형제는 짧은 시간이지만 고통스런 병을 앓다가 선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주님과 성모님의 도움으로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길을 잘 준비하였습니다. 저는 알피 램 형제가 죽기 얼마 전에 친한 친구에게 한 말에 매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를 위해 너무 많은 기도를 하지는 마. 내가 하늘나라에서 너를 훨씬 더 잘 도와줄 수 있을 테니까.” 모든 레지오 단원들은 하늘나라에서 더욱 나은 단원이 될 것이며, 훌륭한 단원들에게 이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알피 램 형제는 하늘나라에서 레지오를 위해 애를 쓰고 있을 것입니다. 그에게 기도하고, 레지오의 사업들에 관해서 그에게 도움을 청하십시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기념이다


하성호 사도요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기념이다.” 여기서 ‘기념’이라는 말은 성경적으로 과거의 어떤 구원사건을 지금 이 자리에서 고스란히 그대로 실현한다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기념’이라는 말은 성경적으로 ‘현실화’ 내지 ‘현재화’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앞의 신학 명제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현실화(현재화)이다”라고 새로 고쳐 표현할 수가 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등으로 신학적 설명을 한다. 하느님의 백성이나 그리스도의 몸은 나와 너, 우리가 모여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명제에서 교회라는 말을 나와 너, 우리라고 바꾸어 놓을 수가 있게 된다. 나와 너도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현실화(현재화)가 되는 것이고, 나와 너가 모여 이루는 ‘우리’도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현실화(현재화)이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현존 때문이고, 교회의 존립목적도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다시 말해 교회를 보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그래야 교회는 명실상부하게 교회인 것이다.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들이 나와 너, 바로 우리들이라면, 나와 너, 그리고 우리들을 보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7; 로마 6,3 이하 참조)


이렇게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과의 관계에 대한 묵상들을 하면서 이런 생각들을 해보게 된다. 다른 이들이 나에게서 과연 그리스도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발견하고 있을까? 이 물음에 봉착하여서는 또 다른 생각을 해본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속한 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와 너가 모여 이룬 세상의 모습이 결국 우리의 모습이란 결론이 나올 것이고, 그렇다면 세상을 가만히 보면 결국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현재의 세상의 모습이 결코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라면, 지금 나의 모습도 그리스도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부끄럽지 않은가!


그래서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우선 현재 나의 몸 안에 무엇이 담겨있는가를. 몸 그 자체는 동물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생명력도 동물성이고 병들어 죽는 것도 동물성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몸이 소중하다고 여긴다. 그 이유는 인간의 몸은 영혼을 담고 있고, 영혼을 통하여 정신의 세계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면 인간은 정신적 실재와 가치들을 동물성인 몸 안에 담아내고, 몸을 통하여 실현한다. 사랑, 정의, 평화, 자비, 용서, 위로 등의 이 모든 것들을 몸으로 표현하고 실현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원래 창조주의 하느님께서 가지신 인간 창조의 의도였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하지만 현재의 나와 너, 우리의 모습은 그렇지가 못한 듯하다. 우리의 몸은 창조주 하느님의 뜻을 담아내는 데도 부끄럽고, 그 뜻을 실현하는 데도 부끄럽다고 고백하고 싶을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이 담아내는 것 바로 그것 때문에 세상이 지금의 이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욕망과 욕구들이 우리 몸에 담기고 실현되기 마련인데, 바로 그것들을 그리스도화 시키지 못하고 있음이 사실이 아니겠는가!
이쯤해서 우리는 참된 신앙인, 명실상부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 태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작업인가를 다시금 고백하게 된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태어나는 것을 소홀히 하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현존시키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교회는 한낱 인간의 집단에 지나지 않게 된다.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동기야 수없이 많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한 점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그 이외의 동기들은 모두 부차적인 것에 불과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기념이다.”


대구 세나뚜스 담당사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양희창 세례자요한

꽃미남 시대를 넘어서 미소년이라는 말이 주류를 이루는 세상입니다. 남성다움, 여성다움으로 구분 짓기보다 구분 없는 외모와 패션이 시대의 문화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자체발광’이라는 표현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얼굴들이 대세입니다. 그 때문일까요? 하느님께서 주신 선천적인 얼굴보다 후천적인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생각을 탓할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잘생김’의 기준이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달랐으니, 앞으로는 어떤 얼굴이 ‘잘생김’의 대명사가 될지 궁금해집니다. 하지만 아무리 미인, 미남이라고 해도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하니, 사람이 자기 얼굴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닌가 봅니다.

비단 ‘잘생김’은 얼굴 모양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얼굴의 형태보다 얼굴에서 느껴지는 이미지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기를 뛰어 넘는 미美의 기준을 제시한다면 단연코 성모님이 아닐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18C 이태리 나폴리 화가 사르넬리의 작품으로 현재 이태리 몬테 카시노 베네딕토 수도원에 소장되어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모님 성화’를 볼 때면, 별로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왜 더 신학적이고 미학적인... 그야말로 보는 이가 압도당할 수 있는 성화가 많은데, 저것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모님 성화”라고 이름 붙였을까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깜짝 놀란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그 성화 속의 누군지 모를 한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 여인이 품고 있는 평온함, 고즈넉함,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과연 그 여인이 품고 있는 것이 무엇이기에, 저토록 아름답고 평온한 얼굴을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가장 아름다운’ 이라는 수식어가 충분하다는 결론을 갖게 한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주님의 기쁜 소식으로 마리아를 찾았을 때,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특별히 루카 복음에서는 주님을 ‘평화를 가져다주는 왕’으로 묘사하는데,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천사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음을 선포합니다(루카 2,14). 히브리 말로 평화를 ‘샬롬’이라고 하는데, 이 말에는 ‘완전함’, ‘충족’과 같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모자람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젖을 배불리 먹고 난 아이의 얼굴이 그런 평화를 누리는 상태입니다. 산천에 피어있는 예쁜 꽃을 보고는 아름다움에 흠뻑 빠지게 되는 것. 그것도 샬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태평스러운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순한 만족감을 뛰어넘어 ‘일치를 이룬 상태’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여러분들은 무엇에서 평화를 느끼십니까? 단순히 맑은 하늘을 본다거나 누군가의 선행을 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하고 평온한 마음이 들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드는 까닭을 생각해보면, 천사의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평화를 느끼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그 대상에서 하느님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 누구와 함께 계시는지를 떠올린다면, 두말할 나위 없이 ‘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이시구나!’ 하고 느낄 것이 분명합니다. 그분이 보여주는 평화로움과 아름다움의 원천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느끼시는 평화는 가장 완전한 풍요로움인 것입니다.


진정 아름다운 것은 외모도 화려함도 능력도 아닙니다. 아름다움의 원천인 주님과 함께 할 때, 겉모습이 어떻든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네 어머님들... 그분들이 겉모습이 아름다우셨나요? 화려하셨나요?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그분들 마음 안에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지고지순한 사랑과 경외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집회서에서 ‘주님을 경외함(1,20)’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말하는데, 아름다운 사랑의 어머니!! 사랑과 경외심으로 가득 찬 어머니!! 지식과 거룩한 희망의 어머니!! 라는 찬사에 걸 맞는 분이 누구실까요? 성모님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가장 지고지순한 사랑과 경외심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경외심이 성모님을 평화롭고도 아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성모님을 바라볼 때 우리도 그 모습에서 주님의 평화와 사랑을 함께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씀은 비단 2000년 전 갈릴래아 나자렛의 시골 마을에서만 들려왔던 소식이 아닙니다. 오늘 이 자리 이곳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모든 이들 안에서도 들려와야할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누군가가, 우리를 바라보는 누군가가 우리 안에 있는 완전하고 충만한, 모자람이 없는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합니다. 그렇게 ‘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 들도록 우리 안에 주님의 말씀을 깊이 담아두도록 해야겠습니다.


대전교구 사목기획국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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