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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1 11:18

월간지 12월호 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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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와 로사리오

교회는 성모님께 수많은 이름을 드렸으며, 우리는 여러 가지 호칭으로 성모님께 기도드립니다. 성모님께서도 또한 몸소 여러 가지 당신의 호칭을 우리에게 일러 주셨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 두 가지만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루르드에서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호칭은 하느님의 세상 구원 계획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성모님은 은총 가운데에서 잉태되었습니다. 성모님은 은총의 어머니,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시기로 또한 이 세상 한 가운데에서,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희망의 표지가 되시기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성모님의 품에서 우리는 정말 편안해집니다. 악과 사탄과 싸움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마리아는 창세기에 나오는 여인, 승리의 표지입니다.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창세기 3, 1-5)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라는 호칭은 우리를 은총과 구원의 세계로, 그리고 하느님과 성모님의 아드님 예수님에게로 이끌어 줍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하느님의 선포입니다. 우리는 이 호칭에서 드러나는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는 레지오가 매우 좋아하는 성모님의 이름입니다.

성모님은 파티마에서 세 명의 아이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몸소 또 다른 이름을 주셨습니다. 성모님은 ‘나는 로사리오의 모후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이것은 성모님께서 로사리오 기도를 드린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 말씀은 성모님이 루르드와 파티마, 그리고 다른 여러 곳에서도 우리에게 분명하게 해주셨으며,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로사리오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성모님의 존재와 정체가 예수님의 신비 속으로 수렴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가 성모님의 태 안에서 잉태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하늘나라에서 함께 계시는 현재, 그리고 영원까지, 마리아에게는 예수님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복음 속에 등장하는 성모님은 당신 아드님의 신비 속으로 완전히 빠져 들어갑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루카 2,19) 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깊이 새기고 숙고하는 것은 그 모든 일에 대해 단순히 생각해 보는 게 아니라, 그 모든 일이 완전하게 당신의 삶속으로 형상화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을 발견했을 때에도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 51) 이 말씀에서 보듯이 성모님처럼 우리 주 그리스도의 신비를 기도하고, 그 신비를 사는 사람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성모님만큼 로사리오를 기도하고, 로사리오를 사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조차 성모님은 가장 완전하게, 가장 깊이 있게 로사리오를 살고 계십니다. 성모님은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신비를 세세한 부분까지 바라보고 계십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과 관계되는 것은 하나도 잊지 않으십니다. 성모님은 전능하신 분이 당신께 하신 위대한 일들을 분명하게 알고 계십니다. 성모님은 당신 안에 있는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이 세상을 구원하려는 아드님의 사랑의 열매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성모님의 마음과 가슴 속에는 완전한 복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로사리오를 통하여, 성모님은 당신의 예수님 체험을 우리와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성삼위의 삶 속으로 참여하고자 하십니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로사리오 기도로 초대하고 또 초대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로사리오 기도는 우리의 삶을 복음과 성삼위에게로 이끄는 부드러우면서도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로사리오가 레지오 영성의 핵심이라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레지오의 정신이 마리아의 정신이며, 마리아는 로사리오의 모후이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로사리오를 모든 레지오 회합의 필수 요소로 만드신 분은 성모님 당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렇게 하여 예수를 레지오의 중심이 되게 하셨습니다. 로사리오 기도는 단순히 지성적인 일이 아니라, 마음과 가슴을 하느님께로 올리는 것입니다. 로사리오 기도는 성모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내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쉽고도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로사리오에 관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으로 로사리오에 관한 이 고찰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로사리오는 성모님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매우 아름다운 관상기도입니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지적하셨듯이 이러한 관상적인 요소를 빼버린다면 로사리오는 그 의미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관상이 없다면, 로사리오는 영혼이 없는 육체와 같습니다. 단순히 기도문을 염경하는 것은, 기도문을 기계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예수님의 가르침을 망칠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 주시는 줄 안다.’(마태 6,7) 라고 하셨습니다. 로사리오 암송기도는 조용한 리듬과 여유가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로사리오 기도를 드리는 동안 주님과 가장 가까이 사셨던 성모님의 눈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 주신 주님의 신비를 묵상하게 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 신비들의 심오한 의미가 드러납니다.”(교황 바오로 6세)

바오로 6세의 이 심오한 통찰을 잠시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황의 이 말씀은 로사리오의 특징, 즉 로사리오가 그리스도 중심의 관상의 한 형태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영성생활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사제가 된 후 쁘레시디움 훈화와 강복을 많이 하였습니다. 힘들 때도 있지만 제가 훈화를 통해서 도움을 주는 것보다, 훈화를 준비하면서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영성생활’에 대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영성생활은 왜 필요합니까?

세상의 것들에 우리들의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증오, 분노, 시기, 질투가 내 안에서 생겨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아름다운 세상에서 기쁘고 행복하지 못 하기 때문에 ‘영성생활’이 필요합니다.

영성생활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누구신지를 예수님을 통해서 알려 주셨습니다. 따라서 영성생활의 목표는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고, 예수님을 체험했던 사람들이 기록한 ‘성서’를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고,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는 것, 그것이 영성생활의 목표입니다.

영성생활의 원천은 누구입니까?

세상을 창조하시고, 조건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창조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세상을,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무한하신 하느님의 사랑이 영성생활의 원천입니다.

영성생활의 힘은 무엇입니까?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 주신 분, 바로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고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 안에 있던 악한 것들은 드러나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면 우리는 새로운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성령께서 영성생활의 힘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와 사랑을 느끼는 것이 바로 영성생활입니다.

영성생활을 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나 자신이 중심이 되려는 교만함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많은 죄악들은 하느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욕심을 먼저 생각한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둘째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열등감입니다. 지난날의 잘못과 죄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열등감은 우리를 영성생활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우리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양털같이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악의 힘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우리의 힘으로는 악의 힘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소는 고삐를 잡고 움직이는 대로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악과 대항해서 맞서면 우리는 악의 고삐를 잡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악한 것들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소의 고삐를 놓아야만 자유로울 수 있듯이, 우리도 악한 것들을 놓아야만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쓰레기 더미에 있으면서 깨끗해지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쓰레기 더미에서 나와야만 비로소 깨끗해집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좀 더 가까이 가기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의식성찰’이 필요합니다. ‘양심성찰’이 나의 죄와 잘못을 돌아보는 것이라면, 의식성찰은 하느님의 이끄심에 나를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식사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은 비만해질 것입니다. 하루 종일 기도만 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성서말씀을 읽고, 기도를 통해서 느낀 것들을 적어야 합니다. 떠오르는 모든 것들을 적어보면 우리가 정화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잘못과 죄가 떠오를 수도 있고, 새로운 희망과 기쁨이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적으면서 정리하는 것이 의식성찰입니다. 식사를 할 때 우리는 그냥 삼키지 않습니다. 꼭꼭 씹어서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소화도 잘되고, 건강해지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할 때도 우리는 ‘의식성찰’을 하면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기도가 온전히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화중지병畵中之餠’은 먹음직스럽지만 먹을 수는 없습니다. 영성생활도 직접, 성서를 읽고 떠오르는 것들을 적으면서 ‘의식성찰’을 하지 않으면 그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영양분은 혈관을 타고 몸에 전달됩니다. 불필요한 것들은 몸 밖으로 배출됩니다. 의식성찰은, 우리가 한 기도가 영양분이 되어 우리의 영혼에 전달되도록 해 줍니다. 의식성찰은 우리 영혼을 정화시켜서 불필요한 것들은 사라지게 합니다.

“신앙의 신비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분께서는 사람으로 나타나시고, 그 옳으심이 성령으로 입증되셨으며, 천사들에게 당신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주어지면 ‘영적식별’에 대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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