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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6 09:47

훈화(200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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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화1> 제발 인사 좀 합시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손을 내밀어 악수하며 인사합니다. 자주 만난 사람들은 미소 띤 얼굴로 인사합니다. 그리고 처음 만난 사람들은 머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합니다. 인사는 인간관계의 첫걸음입니다. 인사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반가움을 나타내는 가장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예의를 중요하게 여겼던 우리 민족은 인사를 잘하고 못하는 것에 따라서 사람 됨됨이를 가늠했습니다. 인사는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이웃에게 관심을 갖는 행동입니다. 인사는 이웃을 반기고 받아들이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인사는 이웃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행동입니다. 손을 내밀어 악수하는 인사는 반가움과 기쁨을 줍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두 손을 잡는 인사는 위로가 되고 희망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는 인사는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에게 존경을 표현하는 행동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시려고 인사하신 분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여 세심한 배려와 관심으로 인사하신 분, 겸손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신 분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의 집에 들어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고 인사합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고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십니다(루카 1,26~38). 이렇게 성모님께서는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하느님의 인사말에 온전히 순명하신 겸손한 분입니다.

엘리사벳은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 불렸고, 이미 아이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나이가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이를 갖게 되자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찾아가 기쁨과 축복의 인사를 나누셨습니다(루카 1,39~45).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은 바로 성모 마리아의 정신입니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닮으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레지오 단원들은 성모 마리아처럼 축하해야 할 이웃에게는 밝은 미소를 띠고 기쁨과 축복의 인사를 해야 합니다. 아픔이나 불의의 사고로 어렵게 살아가는 이웃에게는 두 손을 잡고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인사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이웃들에게는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기 위하여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겸손하게 인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인사를 그렇게 잘하지 않습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친절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본당 공동체 내에서도 반가움과 축복과 격려의 인사를 주고받는 데 너무 인색하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체험합니다. 처음 성당에 나온 예비신자들을 기쁘게 반겨주지 않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이사하여 본당을 옮겨온 신자들을 반갑게 맞아주지도 않습니다. 노인들이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정중하게 배려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예비신자 인도하기가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기본적인 인사조차 하지 않으면서 쉬는 교우를 권면하기가 어렵다고도 말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 내에서도 서로 배려하지 않고 서로 기쁨을 나누지 않으며 서로 위로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예비신자들을 모집할 수 있고 쉬는 교우들이 다시 신앙생활을 하도록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신앙인의 인사는 복음 선포입니다. 동네 사람들과 친절하게 인사하는 것도 복음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직장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하는 것도 복음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길을 걷다가 만나는 사람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시장이나 백화점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친절하고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것도 넓은 의미의 복음 선포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인사는 성체성사의 신비를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어 먹음으로써 나눔의 신비에 동참합니다. 우리가 하는 정다운 인사는 이웃의 기쁨과 함께하여 성체성사의 󰡐일치의 신비󰡑를 사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는 위로와 격려의 인사는 이웃의 아픔을 나누는 성체성사의 󰡐나눔의 신비󰡑를 사는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서로 고개를 숙여 인사합시다. 우리 서로 허리를 굽혀 인사합시다.

_김양회․요한보스코 | 광주 Se. 지도신부




<훈화2> 평화의 모후여,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정해년(丁亥年) 새해 새 아침이 밝았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 가운데, 또한 성모님의 큰 사랑 속에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다시 2007년 365일이 우리 앞에 활짝 열렸습니다. 누구든지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새로운 시작으로 무엇인가 성취하려는 설계와 다짐을 새롭고 굳건하게 할 때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금년 1월 1일은 교황님이 정하신 제40차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당면한 여러 가지 난제(難題) 가운데 평화에 대한 열망만큼 절실한 문제도 없다고 할 것입니다. 자유와 정의와 진리가 모두가 소중하고 긴급하지만 - 중동과 이라크 문제, 세계 도처의 내란과 분규, 특별히 북핵(北核)의 위협 가운데 - 여전히 우리 시대는 불화가 조성되고 있고 쉽게 인명(人命)이 경시되는 풍조 또한 오늘 우리를 슬프고 참담하게 합니다.

지나온 역사를 살펴보면 과연 전쟁이 없던 세월이 있었던가 싶고 각양의 재앙이 우리들 삶의 현장 아주 가까이 상존(常存)해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평화란 반드시 실현해야 할 긴급한 과제요 절대적인 가치입니다. 무엇이 문제이며 또한 평화란 무엇입니까. 이 시대의 주변 현실과 정황이 우리들을 불안하게 하고 어둡게 하고 있다면 언제까지나 오늘의 노여움과 고단함을 계속 멍에처럼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입니까.

과연 오늘의 인류에게 평화란 이룩될 수 없는 환상적이며 허망한 소망에 불과한 것입니까.

뜻을 풀이해 본다면 평화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 전쟁의 반대 개념일 수만은 없습니다. 평화란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정의, 하느님의 질서가 실현되는 것을 의미하며, 평화를 살며 사랑하고 추구해야 할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며 평화의 실현 또한 나에게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로 평화란 평화의 참가치를 살며 사랑하고 애써 평화를 누리고자 하는 이들에게 주어진다고 할 것입니다. 평화란 곧 구원이며 건강하고 무죄한 가운데 틀림없는 행복이고 기쁨 그 자체를 가리킵니다.

새해는 평화를 품고 사는 이가 많아지고 참으로 평화를 이룩하며 살고자 하는 이가 득세하는 세월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평화로운 가정이 늘어나고 지역사회와 국가가 평화롭고, 이 세상 이 시대가 평화를 실현하는 날을 맞이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오늘의 평화란 저마다 주어진 자리에서 자기를 알고 자신의 책임과 역량을 다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람들 마음 한가운데 자리잡은 지나친 오만과 욕심, 편견과 고집, 인색과 분노, 색욕과 질투, 중상모략과 비방, 불의와 불신과 부정이 한없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또한 생각없는 성급함과 나태함이 우리를 어렵고 힘들게 합니다.

어느 현자(賢者)의 소중한 가르침이 생각납니다.

󰡒평화는 군인의 무용(武勇)에 의해 오지 않습니다. 또한 외교가의 수완(手腕)에 의해 오는 것도 아닙니다. 평화는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이 그 사랑을 사람의 마음 한가운데 부어주심으로써 오는 것입니다.󰡓

이 시대 이 세상에 참평화를 가져다 주어야 할 큰 책임과 역할을 감당해야 할 이는 고뇌하며 기도하는 신실한 신앙인, 하느님 나라를 향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계신 우리 레지오 전사들이 아닐는지요.

새해 아침에 우리의 어머니이시고 성모군의 사령관이신 성모님의 천상 전구를 빌며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의 기도󰡑로 새로운 시작을 다짐해봅니다.

_최홍길․레오 신부 | 대구 Se. 지도신부




<훈화3> 삶의 십자가와 주님의 은총은 함께 있음을


제가 신학교 1학년일 때였습니다. 처음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니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좀 긴장을 했는지 새벽에도 잘 일어나고 기도시간에도 잘 나갔었는데, 언제부터인지 긴장이 풀어지면서 계속 늦잠을 자고 기도시간에도 지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기도시간에 지각을 했는데 생활부장을 하는 선배님이, 오늘 저녁식사 후에 자기 방으로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야단을 좀 맞겠거니 걱정을 하면서 선배님 방에 갔는데 선배님은 야구방망이를 들고 서 있었고 앞으로 기도시간에 늦지 말라는 뼛속 깊이 느껴지는 따끔한 충고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밤에 생각에 잠겼고, 󰡒내가 왜 이러는가?󰡓 하고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신학교의 규칙생활은 쉽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밤늦게 공부를 할 수도 있었고, 운동도 하고 싶은 때에 할 수 있었고, 또 늦잠을 자면 어머니께서 깨워주시니 참 편했었죠. 하지만 신학교에서는 정해진 시각에 일어나야 하고, 정해진 시각에 기도해야 하며, 정해진 시간에만 운동할 수 있고, 정해진 시간에 공부해야 하고, 정해진 시간에 잠을 자야 합니다. 하나의 틀에 자신을 맞춰야 하니, 규칙적인 생활에 익숙하지 않았던 1학년 때의 삶은 그에 적응하느라 매우 힘든 것이었습니다.

평상시라면 한참 TV도 보고 놀 시간이지만 취침해야 합니다. 아침잠이 많은 저에게는 기상시간도 참으로 고역이었습니다. 반쯤 감긴 눈으로 성당으로 가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죠. 미사 전의 묵상시간은 거의 졸음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 저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내가 왜 이러는가?󰡓 자신을 질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선배님한테 혼난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죠. 그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규칙에 끌려다닐 것인가? 어짜피 이곳에서 살 것이라면 규칙에 끌려다닐 것이 아니라, 내가 끌고 가며 살아보자.󰡓

그 후로 저는 시계를 5분 빠르게 맞추었습니다. 모든 것을 5분 일찍 살아보자는 뜻이었죠. 그 노력은 성과를 거두어서 미사시간, 기도시간, 수업시간에 조금씩 일찍 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하니까 시간에 쫓기는 일도 줄어들었습니다. 때로는 생각한 것같이 잘 되지 않을 때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미리 준비하는 습관을 들이니까 다급해서 서두르는 일도 적어지며, 서두르다가 빼먹는 실수도 줄어드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삶 안에서 짊어지게 되는 십자가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이 십자가를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좀 더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끌어안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피하려고만 하다가는 오히려 더 큰 낭패를 본다고 하는 것보다, 어차피 다가올 십자가라면 기쁘게 맞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 예수님을 닮는 일이라면 더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당장은 힘들어서 고생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먹기에 따라서 고통은 보람이 될 수도 있고, 우리의 고생은 행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에게 더 큰 약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제가 신학교 1학년 때 선배님의 따끔한 충고를 받지 않았다면 저는 늘 규칙에 끌려다니다가 교수신부님이나 원감신부님께 끌려가서 반성문을 썼을 것이고, 또 그 일이 반복되었다면 신부도 되지 못하고 쫓겨났을지도 모릅니다. 생활의 변화는 어느 정도의 고통을 참아내야 가능합니다. 변화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어떻게 절제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노력이 있는 곳에서 하느님의 은총은 더욱 빛을 발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끌고 계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더 깊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과 십자가의 고통이 함께 있듯이 우리 삶의 십자가와 주님의 은총이 함께 있음을 기억합시다. 아멘.

_윤병길․세례자 요한 신부 | 서울 Se. 지도신부




<훈화4> 성모님의 천상군단 모든 천사들


교회에서 9월 29일은 성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의 축일로, 10월 2일은 수호천사 기념일로 정하여 기념합니다. 이 축일들은, 하느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모두를 끝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 계시는 소중한 천사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교본에 언급된 것처럼(24장 6) 레지오 기도문에는 처음부터 천사들의 도움을 바라는 호도가 들어 있었습니다.

천사들은 기도 생활과 일반적인 레지오의 사도직, 그리고 특별히 진정한 레지오 단원들의 생활에 의미있는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일상생활 안에서 그렇게 살기를 바라면서 교본에 천사들과 관련된 부분을 천천히 기도하듯이 읽어간다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보편적 교리문답집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시어 승천하시기까지 󰡐사람이 되신 말씀󰡑의 생활은 천사들의 경배와 봉사로 둘러싸여 있었다.󰡓 또 이런 표현도 있습니다. 󰡒천사들은 그들 전부를 바친 하느님의 종이요 전달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마주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모든 천사들이 우리의 기도 생활이나 사도직 생활에 항상 함께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은 위대한 성인들보다도 더 우리 정신의 구원에 직접 관여하고 활동하기 때문에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사도직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내어주신 이렇게 강한 천사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열고 진실되게 대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모든 천사들에 더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신앙생활이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우리를 지켜주고 도와주는 특별한 천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것을 명상함에 있어 결코 지치지 않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프랭크 더프는 분명하게 그의 수호천사에 대해 아주 특별한 우정과 사랑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는 이러한 수호천사에 대한 사랑이 우리 레지오 영성에 진정한 한 부분이 될 것을 갈망하였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방문하고 또 접촉하고 있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가 어렵고 반응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호천사를 위해 기도를 드린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 되겠습니까?

천사들은 성모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집니다. 교회는 성모님에게 󰡐천사들의 여왕󰡑이라는 사랑스러운 호칭을 부여하였습니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마련된 성모님의 자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천사들은 성모님이 주님의 어머니로, 또 전 인류의 어머니로 선택됨을 너무 기뻐하십니다. 성모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계시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섭니다. 천사들은 우리 모두에게 향한 성모님의 모성애가 얼마나 깊은지를 잘 알고, 또한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성모님이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일을 나누고 지원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정신의 구원을 위한 성모님의 봉사에 전적으로 함께하십니다. 이러한 천사들의 역할은 우리의 레지오 단원으로서의 역할과 나란히 함께 갑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이 정신을 위한 큰 전쟁에 함께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일들이 분명히 잘못되어 가거나 우리가 큰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가능한 모든 개인적 도움의 방법에 의존하는 일에 소홀할 수 있습니다. 신단원 모집에 진전이 없어 보이거나 영웅적인 사도직 업무에 두려움을 느낀다거나, 또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절망하고 있을 때, 우리는 주님과 그분의 어머니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과 성령께서 우리의 가까운 곳에서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 또한 천사들이 친구로서 우리와 팔짱을 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쉽게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레지오 단원으로서의 신앙생활을 다짐하고, 우리의 수호천사와 성모님의 천상군단 모든 천사들에 대한 우정과 사랑을 새로이 다져 나가야 하겠습니다.

_맥그리거  신부/ 강용대 역




<훈화5> 저는 지금 쉬고 있습니다


레지오 단원의 올바른 신심은 성모님의 신심이라는 것을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선서를 할 때는 무슨 의미로 선서문을 읽어야 하고, 무슨 의미로 선서를 하였는지도 모르면서 정단원이 되었노라고, 이제는 예비단원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새롭고 번듯한 정단원의 타이틀을 거머쥔 후, 󰡐그까이것 대충󰡑 단원생활을 하는 형제, 자매들을 보면 한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선서를 하기 전에 레지오에 대한 올바른 신심이 몸에 배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간부님들과 선배단원들의 역할이 커야 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에드먼드 버크는 󰡒훌륭한 모범이야말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최고의 학교이다󰡓라고 했습니다. 도제제도에 의한 교육이야말로 레지오 단원들이 제일 많이 배우게 되는 자연스러운 교육이므로 이 말씀보다 더 정확한 가르침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왕년에 쁘레시디움 회계, 서기, 부단장, 단장을 거쳐 꾸리아 단장을 했으며, 꼬미씨움 간부까지 했었다는 것, 또 나이가 50이 넘고 60이 넘은 것이 무슨 자랑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열심히 단원생활을 하시는 어르신들을 싸잡아서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야말로 우리나라의 레지오의 성장을 일구어 오신 분들이 아닙니까? 하지만 연륜이 있으신 것만큼 아집이 있어 단원들에게 경험과 나이 많은 것만 자랑한다면 잘못이라고 생각됩니다. 레지오 경력 몇십 년, 간부 경력은 자랑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레지오 간부를 어떻게 해왔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저는 어느 여름날 등나무 그늘 아래 쉬고 있던 형제님과 우연히 대화를 한 적이 있는데, 쉬지도 않고 뿜어내는 말씀이 전부 다 자기의 신앙관이 아니고 조상님 때부터 내려오는 구교 집안이라는 것부터 사촌형님이 신부님, 이모가 수녀님, 삼촌이, 어머니가 꾸리아 단장, 총회장 등 교회의 간부 내지 봉사자, 사목자, 수도자까지 전부 하고 계시다, 했었다로 일관합니다. 반가운 마음에 기대를 하며, 형제님도 어느 정도 위치의 인물이 되겠거니 하며, 조심스럽게 󰡒지금 무슨 활동을 하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그만 목소리로 󰡒저는 지금 쉬고 있습니다󰡓 합니다. 󰡐이것이 그 형제님이 그렇게도 주변을 포장한 이유였구나󰡑라고 생각되니 너무나 허탈하고 배신감마저 들기까지 합니다.

레지오 단원 여러분! 윗글을 읽어 보신 후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과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며, 나를 돌아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후배 단원을 온화한 모습과 사랑으로 대해 준다면, 신입단원들이 󰡒나는 언제나 저 간부처럼, 선배님처럼 할 수 있을까󰡓 하고 선망하지 않을까요? 활동을 함에 있어 󰡒어떻게 하면 편할까? 어떻게 하면 쉬울까?󰡓를 궁리하며, 요령도 부려가며 활동을 한다면, 성모님께도 자기 자신에게도 결코 좋은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지나간 세월의 모습보다 지금의 모습이 더 나아야 전임 간부다운 경력자이고, 연세가 많이 드신 연륜 있는 단원의 모습이 아닙니까?  언행일치(言行一致)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얼마나 존경을 받게 되겠습니까?  󰡒나는 훌륭한 레지오 단원이오󰡓라고 자기 자신이 말하기보다는 다른 이로 하여금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존경하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간부 여러분! 선배 단원 여러분! 여러분이 보여주는 행동이 󰡐레지오의 성공의 지름길이 되느냐, 실패의 원인이 되느냐󰡑의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간부는 간부다워야 하고, 선배는 선배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구든지 자기 위치에서 우리가 모시는 분의 뜻을 헤아려 의무를 충실히 지켜 나간다면 󰡐성모님께서 지휘하는 지상군단󰡑의 모습이 제대로 되지 않을까요? 이러한 모습을 보시는 성령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사랑하는 레지오 단원 여러분!

우리 다 함께 똑바로 서는 레지오를 위하여 열심히 노력합시다. 항상 기도하며 실천합시다. 끝으로 다음 말씀을 단원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 20).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ß]

_정운석․사도 요한 | 수원 Re.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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