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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7 10:28

10월호 월간지 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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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올바른 신앙생활의 마음가짐을 생각해보며

                                                                           이용호․가브리엘 신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임금이 하루는 무학대사에게 농을 걸면서, 󰡒대사는 꼭 돼지 대가리 같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대사는 󰡒임금님은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같습니다󰡓라고 고개를 정중하게 굽히며 예를 표하였다. 이에 임금이 󰡒나는 그대의 모습을 󰡐돼지 대가리 같다󰡑라고 하였거늘, 그대는 어찌 나를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같다󰡑하오?󰡓라며 의아해하였다. 무학대사는 임금을 향해 󰡒부처 눈에는 부처밖에 보이지 않소이다󰡓라고 답하였다.

  

사도 바오로께서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코린 2,15). 장미가 꽃을 피우면 무슨 향기를 피우는가? 그야 장미향이다. 우리는 누구이며, 또 우리는 무슨 향기를 피우는가?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에페 2,10). 꽃은 무슨 꽃이냐에 따라 바로 그 꽃의 향기를 뿜어낸다. 에페 2,10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다. 그렇다면 그 존재에 걸맞은 향기를 뿜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밤새 허탕을 친 어부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신다. 그리고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시어 호숫가에 모인 군중에게 말씀을 하신다. 말씀을 마치시고 베드로를 향하여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하셨고, 베드로는 그대로 하였다. 물고기는 엄청나게 많이 잡혔다. 베드로는 자기와 대화를 나눈 분이 주님이심을 깨닫는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두려워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루카복음 5,1-11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과연 신앙이란 무엇인가?󰡑 자문하게 된다. 신앙이란, 베드로와 그 동료 어부들이 그랬듯이 주님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 하겠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향해 말씀을 하실 때 베드로는 무엇을 하였을까? 정확하게는 모른다. 다만 예수님과 대화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그물을 씻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추정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그 말씀에 동의를 하고 있지 않았겠는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동의하였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을 것이다. 이를 우리는 신앙이라고 한다.

  

신앙은 운명의 변화를 의미한다. 운명이 바뀌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덧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속속들이󰡑가 다 변화되는 것이다. 덧칠하는 것은 대충 시늉만 하고 사는 것일 테고, 존재가 변화되는 것은 변화된 그 존재로 사는 것이다. 베드로와 동료들이 자신들에게 다가온 주님의 운명을 자신들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하였다. 그 다음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주님의 운명을 배우고, 그 배운 주님의 운명을 자신들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지 않았던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는 괄목할 만큼 양적(量的) 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질적(質的) 성장도 그러한가? 수치에서 드러나듯이 예비자는 눈에 띄게 줄었고, 냉담자는 엄청나게 많이 불어났다. 청소년들은 교회에 관심조차 두려하지 않는다. 그 원인이야 많겠지만, 우리들이 질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니겠는가? 주님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일진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과연 얼마만큼 따르고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하고, 예수님의 기적을 보며 이분이야말로 오시기로 되어 있던 바로 그 메시아라며 흥분하던 군중들은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실망할 대로 실망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예수님과 운명을 함께 하자던 제자들까지도 그랬다. 하지만 군중들과 달리 제자들은 뉘우치고 돌아섰다. 성령이 그들을 그렇게 이끌었다. 어쩜 우리들도 매일 이 과정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령의 부르심과 세속의 속삭임 속에 시계추처럼 오가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가?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성모님을 총사령관으로 모신 군인들이다. 군인의 생명은 군기이고, 군기의 생명은 명령을 따르는 복종이다. 세속의 온갖 부귀영화를 추구하기 위해 우리가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고,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 된 것이 아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로마 6,4)라고 하셨다. 아들 예수의 운명을 철저히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신 성모님과 함께 이젠 우리가 바로 그 삶을 살아야 하겠다. 예수님은 참된 제자가 되겠다며 맹세하는 우리들을 향하여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 13,15).ß]

+대구 Se. 담당사제

  

  

  

2.순 례

                                                     김진룡․안토니오 신부



서너 걸음 걷고 󰡒쫘아악󰡓, 다시 서너 걸음 걷고 󰡒쫘아악󰡓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세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체투지󰡑라고 불리는 이런 수행법은 특별히 티베트 불교에서 볼 수 있는데, 두 무릎과 양 팔꿈치, 그리고 이마까지도 땅에 댐으로써 최대의 겸손을 드러내는 몸 수행의 일종입니다.

  

얼굴은 땀과 흙, 그리고 태양에 까맣게 그을려 윤기가 반지르르합니다. 몸은 피곤에 절어 만신창이가 되었을 터인데, 이들의 발걸음은 도대체 멈출 줄 몰랐습니다. 사막이든, 실개천이든, 눈 위든, 아스팔트 위든 묵묵히 입을 다문 채 그저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습니다. 등짐지고 그들의 수행을 돕는 이도 없습니다. 때가 되면 구걸해서 먹는 밥이, 말라비틀어진 찬밥이든 몇 가지 반찬이 곁들여지든 개의치 않습니다. 걷다가 몸이 아파 들른 병원에서 당장 죽을 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해 듣곤 다시 수행의 길을 재촉합니다.

  

무려 180여일, 이들의 장정은 마침내 성지에 도달합니다. 장엄한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초라한 세 남자의 행렬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낡은 차들의 신경질적인 경적 소리도 아무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성전 앞에 선 이들, 필자의 심정이라면 눈물이라도 쏟아질 터인데 그들의 표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시 만 팔백 배의 절이 행해지고서야 그들의 수행은 끝을 맺습니다. 사원 안에 있던 그들처럼 평범한 몇 사람만이 그들의 이 대장정을 축하해 줄 뿐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20대 젊은이와 50대의 사내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30대의 사내는 승려가 되겠다며 사원에 남았습니다. 그들의 순례 길은 그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부터 그런 결심을 하고 순례 길을 나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터뷰를 하는 방송사 앞에 담담히 드러내는 그들의 첫 마음은 󰡒그저 순례길 자체가 목적󰡓이었습니다. 그 순례 길에서 그들은 자신의 앞길을 그렇게 초연하게 결정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감명 깊었습니다.󰡓 그렇게 운을 떼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먼지와 땀이 뒤엉킨 얼굴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내딛는 힘찬 발걸음에서, 그리고 대단한 여행이었음에도 초연한 그들의 표정에서 감명을 받았다고 토로합니다. 표정에는 진심이 어려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일까?󰡓 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이유를 물으면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라고 얼버무립니다. 그렇지요. 말 그대로 우리는 그들로부터 머나먼 문명세계(?)의 한 가운데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숨 가쁜 속도와의 전쟁을 하고 있기에 그런 대답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우리의 성지순례가 대비되어서는 아닐까요?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신앙생활이 대비되어서는 아닐까요?

  

오체투지의 순례객들은 그들의 순례길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인생이라는 순례길에서 성모님과 함께 힘차게 걷고 계시겠지요?󰡓ß]

+전주 Re. 담당사제






3.레지오와 사제

                                                                        맥그리거 신부 / 강용대 역

레지오 마리애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일 중의 하나는 수많은 형제자매들이 나이에 관계없이 레지오 안에서 또는 레지오를 통하여 그들의 소명을 발견하였다는 것입니다. 많은 레지오 단원들이 성직자와 수도자가 되었고, 이것은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와 이제는 하나의 사실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이 레지오를 통하여 지역교회 안에서 결혼하고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소명을 뚜렷이 인식하고 있으며, 이것 또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온 사실입니다.

그리고 말 그대로 수백만 명의 평신도들이 성인들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소명을 잘 인식하고 있고 또 레지오 단원으로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하는 것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계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얘기하는 것은 금년이 이러한 소명을 키워나가기 위해 특별히 봉헌된 해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소명은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결혼과 같은 평신도들에게 맡겨진 사명과 소명 등을 모두 아울러 말합니다. 소명을 다짐하는 금년에 저는 모든 소명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언급해 나가겠지만, 오늘은 특히 사제의 소명과 이 특별한 소명 안에서 레지오의 역할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제직의 의미에 대하여 기술한 보편 교회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아르스의 성자󰡑(역자 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 본당신부들의 수호성인. 프랑스의 작은 마을 아르스의 본당신부로서 고해성사를 통해 화해하시고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할 수 있게 하여 프랑스 전역에서 2만여 명의 사람들이 찾아왔기에 그는 하루 18시간을 고해실에서 보내기도 하였다. 1925년 시성되었다)의 말을 인용하였습니다.:

  

󰡒󰡐사제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계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제들을 진정으로 잘 이해한다면 우리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우리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제직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속 깊은 사랑입니다.󰡑 사제는 이 세상에 현존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사제들이 존재하는 의미는 예수님을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찬례가 없어서, 우리 모두에게 가까이 계시며 또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느낄 수 있는 성체가 없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황폐하겠습니까? 그리고 또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죄를 끝없이 안아주시고 따뜻하게 힘을 북돋아 주시는 화해의 성체가 없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절망적이고 낙담스럽겠습니까? 그 성체 안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이 무엇을 했든 또 그들이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죄인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선포하십니다. 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몸이 아프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병자성사 중에 성체 안에서 우리를 치료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 그리스도가 우리 삶 안으로 오시는 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사제 안에서 또는 사제를 통하여 오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계획을 우리는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사제는 서품식에서 사제의 특성을 부여받습니다. 이는 사제의 인간적 본질 안에서의 변화를 의미하며, 그의 영혼이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서 신비체인 교회의 머리이자 목자로서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로서 행동할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사제는 미사 때 성체를 들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것은 내 몸이다󰡑 라고 말합니다. 고해성사에서 보속을 주면서 󰡐그리스도가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 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사제는 선생님이나 의사들이 자리가 빌 때 대신해서 하거나 또는 예수님을 대신해서 파견된 대사나 대표로서 활동하는 대역이 아닙니다.

  

서품식에서 받은 사제의 특성에 의하여 사제는 그리스도이신 사제가 되었으며, 따라서 사제 안에서 사제를 통하여 행동하시는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십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사제직을 선물로 주신 것을 묵상하면 앞에서 사랑으로 우리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아르스의 성자󰡑의 말씀이 얼마나 가슴에 와 닿는 표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아무도 사제의 소명에 대하여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제의 역할이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일이라고 할 때 우리는 누구를 떠올릴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을 모시고 오는 것이 특별한 소명이신 성모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모님과 사제는 이끌어가는 길은 다르더라도 정확하게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목표가 같기 때문에 사제는 진정한 사제로서 그의 소명을 완수하고자 생각한다면 성모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이 세상에 모시는 일을 잘 수행하신 분이 성모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만이 우리에게 예수님과 일치하여 하나되게 하시고, 나아가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모시는 일을 어떻게 잘할 수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사제들의 삶에서 성모님의 특성, 곧 성모님이 모든 사제를 잉태하시고 사제들의 정신적 삶과 그들의 모든 사목활동에서 그분께서 하시는 특별한 역할을 소홀히 한다면 사제의 삶은 피폐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제들의 소명 안에 우리 레지오는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까요? 레지오가 그 목적을 수행하는 방법은 다를지라도 이미 사제들과 동일한 목표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레지오가 존재하는 이유는 성모님 안에서, 성모님을 통하여,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을 이 세상에 모셔오기 위해서입니다. 레지오는 성모님께서 온 인류를 잉태하심을 나누려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레지오와 사제 사이에 흐르는 돈독한 관계는 결코 과장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레지오와 사제는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을 이 세상에 모시는 일을 함께 수행하기 때문이며, 이 둘을 함께 굳건히 묶어 주시는 분이 바로 성모님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레지오는 사제가 개인적인 많은 제약과 죄를 무릅쓰고 그의 소명을 수행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제는 궁극적으로 그의 모든 중요한 일을 이 세속의 배에 싣고 가야하기 때문에 레지오는 사제들에게 희생과 봉사로써 크나큰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레지오 단원들은 특별히 사제의 손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시는 성체를 경배함으로써 사제를 위하여 끊임없이 중재에 나서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금년 우리의 소명을 키워나가기 위해 특별히 봉헌된 해에 전 세계에 있는 레지오 단원들은 사제들을 더욱 깊고 새롭게 이해하고 사랑하며, 레지오의 영적지도자인 그들에게 더욱 힘을 북돋아 주기를 바랍니다.

  

레지오는 사제들이 레지오 안에서 복음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고, 평신도들의 사도직 현실과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힘을 얻을 수 있으며, 나아가 우리 레지오 안에서 성모님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끼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레지오에 이런 진정한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면 사제들은 점차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레지오를 포기하게 될 것이며, 이는 사제와 레지오 모두를 위하여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을 버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어떠한 것도 사제와 우리 레지오 사이에 있는 크나큰 신뢰의 기반을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기도합시다.ß]

+꼰칠리움 영적 지도 / 서울 Se. 국제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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