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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10 10:04

12월 월간지 훈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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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저에게 외로운 성탄입니다
                                                                                   김양회요한보스코 신부


아마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곳도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초라하고 볼품없고 냄새나는 곳에서 태어나셨을 것입니다.

전남 나주시 노안면 유곡리 산 29번지 현애마을.
사람들에게 무관심과 두려움의 대상인 나환우들이 모여 사는 곳.  
모두들 돼지농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숨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온 동네에 쾨쾨한 냄새가 배어있는 곳.

작년에도 그랬듯이 올해도 그곳을 찾아 성탄 밤 미사를 드렸습니다.
수녀님들이 계시지 않은 곳인데도 어떻게들 준비했는지
젊은 자매님 한 분이 제의를 준비하고 제대에 촛불을 준비해주었고
초등학교 5학년쯤으로 보이는 복사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작은 분위기, 어떤 사람이 보더라도 가난한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고 그들을 향하여
미리 준비한 강론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게 태어나셨고 예수님을 만나려면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만나야 하며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강론을 하면서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내 강론이 과연 어떤 위로와 도움이 되겠는가?
가난하고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 사람들에게 내가 하고 있는 강론이
과연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겠는가?

저의 목소리의 힘이 점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고 아무런 위로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저의 강론은 허공을 향해 외치는 무의미한 소리밖에 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제단 앞에는 예수께서 탄생하셨다는 구유를 만들어놓은 것이 보였습니다.
썩은 나무토막을 잘라서 둥그렇게 세워놓고 전나무 가지 꺾어다
바닥에 깔아놓고는 그 주위에 깜박이 한 줄을 늘어놓은 말구유.
도시 본당이면 이리 꾸미고 저리 꾸며서 예쁘고 그럴듯하게 만들어 놓고서
이 사람 저 사람 온갖 폼을 잡아가며 사진이라도 한 장씩 찍으련만
누구 하나 관심 있게 바라보지 않을 작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구유였습니다.

미사가 끝나갈 무렵, 영성체를 마치고 묵상을 하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만일 저 사람들의 처지가 되었다면 나는 어떤 마음이겠는가?
내가 만일 저 사람들처럼 나환우라면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겠는가?
절망, 좌절, 포기, 괴로움, 고통, 분노, 한탄, 방탕, 원망.

제가 만일 그들과 같은 처지에 놓였다면 친구들과 이웃들도
저를 멀리할 것이고 친인척들 모두들 저를 외면할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저를 피할 것입니다.
아니 차라리 그들이 저를 멀리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들을 멀리해 버릴 것입니다.
그러고는 원망할 것입니다.
친구들을 원망하고 나를 낳아준 부모님을 원망하고
세상에 태어난 자체를 한탄할 것이며 하느님도 원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하느님뿐이었습니다.
하느님만이 희망이요 하느님만이 위로요
하느님만이 그들의 안식이었습니다.
제 눈에는 분명히 그렇게 보였습니다.

설령 그들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한들 무슨 위안이 되겠으며
설령 그들의 자녀들이 성공한들 무슨 기쁨이 될 것인가라는 생각에
부모도 형제도, 세상 모두를 원망하고 하느님까지 원망하고 원망하다가
끝내는 하느님만을 희망하는 사람들.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하느님께 삶과 죽음을 맡겨버린 사람들.  

미사가 끝나고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면서 가난한 선물을 하나씩
받아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노안본당에서 성탄기념으로 보내온 떡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찌나 초라한지,
마치 실직자들이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보듯이 바로 그런 착잡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절룩거리며 집을 향하여 걸어가는 사람들,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빛을 향하여 어둠을 헤집고 걸어가는 사람들,
저는 인사를 나누고 그들의 뒷모습을
한동안 아무런 생각 없이 바라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저 역시 사제관으로 향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사제관.
성탄에는 더욱 기뻐야 하고
성탄에는 더욱 행복해야 한다는 기대심리 때문에
성탄이면 오히려 더욱더 외롭고 쓸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처음부터 그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뭔가 허전하고 적적한 고독감이 찾아들었습니다.

성탄인데 가족이 없다는 생각,
성탄인데 함께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시며
웃음꽃 피어날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지금 내 곁에 없다는 생각.
그래서 저에게 오늘은 가난한 성탄이랍니다.
그리고 오늘은 저에게 외로운 성탄이랍니다.

그러나 알았습니다. 이론으로만 알았던 사실,
머리로만 알았던 사실을 오늘은 몸과 마음으로 알았습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얼마나 가난하고
얼마나 초라한 탄생이었는가를 눈으로 보고 알았습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도 보고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통하여 저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당하여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가슴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밤이 저에게는 정말 고마운 밤입니다.
오늘밤이 저에게는 거룩한 밤입니다.
2천 년 전 성탄을 조금이나마 몸으로 체험하게 된 오늘밤이
저에게는 정말 은혜로운 밤입니다.

_광주 Se.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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