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조회 수 2764추천 수 0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얼마 전에 성지보존위원회의 곽병천 선생께서 태평성당을 찾아 오셨단다.
태평성당이 순교자를 배출한 성지일 가능성이 큼으로 현장조사차 나오셨다는 이야기다.
태평 60년사를 편찬할 때, 신은근 신부님으로부터 통영에서 8사람이 치명당하셨다고 뮈텔주교의 ‘치명일기’에 나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흥분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모처럼 통영에 오신 곽선생을 만나보지는 못하였지만, 20여 년 전, 능력의 한계 때문에 묻어두었던 사연과 의문을 다시 끄집어내어 편지를 보냈다.
통영이 성지로 증명되는 그날을 기대하면서.......  


" 나의 성지순례 길 “  [ 1989. 6. 18. 태평주보]

  집이 정량동 상고 앞에 있어 교회를 나올 때는 운동장과 테니스장 사이로 해서 언덕길을 숨차게 올라오면 매일 봉에서 맨대, 장대 등이 눈 아래 보인다. 비석 골의 골목은 좁고 꼬불꼬불 하며 집들은 초라하게 엎디어 있지만 왠지 정이 가는 곳이다. 그것은 우리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한 굽이를 돌면 눈에 익은 교우 집이 빠끔히 보이고 또 한 구비를 돌면 반가운 얼굴이 거기서 웃고 있다. 시간이 있어 대문을 열고 “계십니까?”하고 목청을 돋우면 당연히 커피한잔 정도는 무료다.

긴 골목을 빠져 나오면 토성고개의 한 고개다. 건널목을 건너 바삐 걸어 내려오면 태평천주교회가 늘 그렇게 서 있다. 이 똑같은 길을 2년이나 넘게 다니고 있다. 평범한 이 길이 “태평본당 60년사”를 보고부터는 나 혼자만의 성지순례의 길이 되어 버렸다.

이 요한 회장은 본래 동래사람이었는데 무과에 급제한 장교로서 궁도 선생이었다. 직업이 안정되고 소위 중산층이었으며 효심 있는 아들 며느리와 화목하게 살고 있었으나 그 분은 진리의 길을 따라 형극의 길로 나선다. 병인년 대 박해가 일어나자 아들, 며느리, 조카 등 일족을 데리고 인근 기장으로 피신을 한다. 그는 그 당시 지도층에 있던 분이라 면식이 있는 동래 포졸에게 발각되기 쉬웠을 것이다. 바닷가를 따라 그는 다시 울산으로 도피한다. 거기에서 서울사람인 이 성원, 차 방지거, 양 말디노 등과 숨어살았으나 끈질긴 동래 포졸이 울산까지 추적하여 그들을 잡아 통영으로 압송한다.

1869년 그 당시 감방은 통제영 한쪽구석인 지금의 학생회관자리라고 한다. 차디찬 감옥에서 발아래 철썩거리는 파도소리에 부스스 잠깨니 달은 휘영청 밝은데 목에 큰칼 차고 있는 아들, 며느리, 조카 등을 내려다보고 있는 80노인인 이 요한 회장 심정은 어떠하였고 그 분은 그 날 밤 무슨 기도를 올렸을까?
  
인정사정없는 형리들은 망나니 칼을 휘두르며 사형수들의 얼굴에 회칠을 하고 양쪽 귀에 화살을 꽂은 채 북문이 있는 지금의 토성고개 넘었으리라. 그 당시 처형지는 추정하건대 장대 쪽이라고 하니 아마도 지금의 화장터 근처가 아닐지? 그분들은 비석 골을 따라 죽음의 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한 고개에서 숨을 돌리고 먼 산과 바다를 마지막으로 둘러본 지점은 어디쯤일까?

신앙인의 눈에는 기적이 아닌 것이 없다고 했던가? 이 요한 회장이 달 밝은 밤에 외로운 기도를 바치든 그곳이 학생회관이고, 지금도 성모님이 내려다보고 있다. 그 외로운 밤을 이어 받아 지금도 레지오의 기도가 합창되어 메아리쳐 울려 퍼지고 있고, 그 분들의 피땀이 무수히 떨어졌던 비석 골에 우리 신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이 바로 기적이 아닌가! 칼날선 망나니의 칼에 외롭게 목이 떨어졌던 그곳을 찾아서 제3성전을 지었으면 한다.

오늘도 저녁 일찍 먹고 성당으로 가는 길이 그때의 길이 아니면 또 어떠랴! 그러나 내 마음은 120년 전으로 돌아가 그분들의 뒤를 따르는 나만의 성지순례가 되니 옷깃을 여미자, 순교자 이 요한 회장님의 영령들이여, 영원한 안식을 찾으소서.




곽병천(베드로) 선생님께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마산교구 태평성당의 교육분과장을 맡고 있는 김형진(레오)입니다.

일전에 저희 본당을 방문하시고, 순교자 및 성지에 관한 조사 및 말씀을 들었다고 사무장에게 전달 받았습니다. 저희 성당에 관심을 가져 주시고, 더구나 성지로 선정 가능하시다는 말씀에 쌍수를 들고 환영합니다. 저희 본당은 내년에 설립 80주년을 맞이합니다만, 통영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그 보다 훨씬 전인 1900년경입니다.

20여 년 전, 본당 60년사를 편찬할 때, 마산교구 신은근 신부님으로부터 조선교구 8대 교구장이신 뮈텔주교의 치명일기 중에 동래사람 이요한 등 8명의 순교자들이 기장에 피신하여 있다가 동래 포졸에게 잡혀 통영에서 참수 치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말씀을 듣고, 신부님으로 부터 그 자료를 복사하여 60년사 책자에 기록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의문이 있고, 그 의문에 속에서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하여 이렇게 세월만 흘렀습니다. 그 내용을 조사하여 확실한 성지로 저희 본당이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1. 치명일기(817번에서 825번 까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817. 이요한 회장은 본래 동래 장교로 무과에 통과한 후, 활 쏘는 선생으로 있었는데, 병인년 기장 땅으로 피하여 삼년을 있다가 울산으로 옮겨 살다가 다른 교우들과 함께 동래 포졸에게 잡혀 47일 후에 통영으로 가, 여덟 사람이 함께 참수치명 하니 나이가 80세더라,

818. 이성일(서울 사람), 819. 이방지거(요한의 아들), 820. 박마리아(이방지거의 아내), 821. 이베드로(이요한의 조카), 822. 차방지거(이요한과 함께 치명), 823. 양말띠노(이요한과 함께 치명), 824. 옥발바라(앞에 사람과 함께 치명)

825번 옥발바라.        
동래사람으로 병인년에 통영으로 잡혔다가 나와서 무진년에 다시 동래에서 잡혀 장대에 나아가 참수치명 하니 나이가 51세라. 위에서 말한 사람(옥발바라)과 한 사람인지 아니지 확인이 불가능하다.

여기서 824번, 825번 옥발바라는 동일인인지, 동명이인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치명일기에서도 의문을 표시합니다만, 동일인이라면 처형장소, 체포 장소 등이 서로 달라서 역사기록의 오류성이 의심됩니다.

2. 이요한이 825번째 옥발바라처럼 동래포졸에게 잡혔다면, 당연히 동래에서 치명당하지 않고 통영까지 압송되어 치명하였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다만, 옥발바라가 치명참수 당하였다는 ‘장대에 나아가’ 라는 지명은 통영에 아직도 ‘장대’로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부산동래에 이러한 지명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3. 부산 오륜대 성지에 가면 이요한의 무덤이 있습니다.
오륜대 성지 관리소에 자료를 찾아보면 이요한의 무덤이 어떻게 생성되었으며, 그분이 성지에 안장하게 된 경위나 자료가 있을 것입니다.
저희들이 전문성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서 확인 등의 절차를 밟지 못하였습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조사가 가능하다고 사료됩니다. 한편, 오륜대에 계시는 이요한이라는 분과 통영에서 참수되었다는 이요한이 동일인물인지도 확인이 필요합니다.  

4. 이요한 등은 1869-1870년 전후에 참수 치명되었다고 사료됩니다만, 조선조 말기에 지방인 통영에서 참수가 가능하였는지?
혹여, 수군이 조사 체포하였기 때문에 통영에서 참수하였다면, 그 시대에 통제영 참수기록이 남아있는지가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자료는 통영에서 찾기가 어려워서 저희들이 한계를 느끼는 부분입니다.

5. 통영은 조선수군 통제영으로 300년을 이어온 역사 깊은 도시입니다.
저희 태평성당은 옛날 통제영 경계 안에 위치해 있고, 옛날 감옥 터였다는 증언들이 있습니다. 만약 이요한이 통영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장대에서 치명 참수하셨다는 증명만 된다면, 통영은 순교자 성지로 거듭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왜냐하면, 성당 터는 순교자들이 옥고를 치루면서 절절한 기도를 올렸던 바로 그 장소가 되니까요.


아무튼 좋은 사업을 하시는 선생님께 경의를 드립니다.
아울러, 선생님의 탁월한 능력으로 이요한등의 순교자 참수치명장소를 알아낸다면, 통영은 순교자의 기운을 이어가는 자부심을 가진 지역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하시는 일에 주님의 은총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

통제영은 선조말인 1604년 부터 고종 때인 1895년 까지 무려 292년간 통영에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주로 한양에서 화폐를 주조하였습니다만, 유일하게 통제영에만 화폐주조 권한을 나누어 줄 정도로 막강한 조직이었지요. 지금도 통영에 주전골이 있고, 여상 터에 화폐제조 유적이 나와 주차장이 보류되었지요?
하여 이러한 막강한 자리에 있는 통제사가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부임 1년 내외에 교체를 하곤하여 292년 동안 무려 200여명의 통제사가 나왔지요.

이요한 회장이 1869년 정도에 참수치명 당하였다고 하니, 통제영 말기이지만 그래도 이 주위에서 수군으로는 최고의 권력기관이라 사료됩니다. 또한 당시 서슬퍼런 병인박해의 뒤끝이라 천주교 신자들을 서울까지 압송하지 않고 통영에서 처형하는 것은 통제사의 권력이나, 그 당시 상황으로 보건데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해미처럼.....
다만, 심증은 가나 구체적인 물증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지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날짜조회 수
495 Concilium Letter 719 박기탁2005.12.1684194
494 옆집 여자와 잠자리를 .. 1 김덕곤요한2005.07.214505
493 <b>다시한번 알려 드립니다. 회원가입시</b> file 관리자2008.05.193214
492 양덕성당 9월 동영상뉴스 양덕성당2007.09.163128
491 백실리움 마산레지아2007.08.173105
490 평의회 여름캠프사진 과 기사입니다 박유성2008.09.133084
489 마산 상남 제2꾸리아 창단식 사진과 기사입니다 1 박유성2008.09.132953
488 허철수 레지아 지도신부님을 위한 축일기도부탁합니다. 2 마산레지아2005.09.132914
487 ■■ 양덕성당 동영상뉴스 ■■ 3 양덕성당2007.07.132906
486 안상덕(다니엘) 단장님 축일을 축하합니다 2 †황국일(모세)2006.07.212904
485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선종을 애도합니다. 1 file 서경2009.02.162901
484 순교자 묘소 도보 순례 (박대식 빅토리노, 신석복 마르코 4/18, 4/25) 2 file 김용덕 요한2010.04.302895
483 중국산 제품의 장점^^ 비탄의 바다2008.10.242886
482 정영규신부님의 은퇴를 아쉬워하며 안경2004.01.302858
481 ■■ 양덕성당 8월 동영상뉴스 ■■ 2 양덕성당2007.08.112800
480 함안 필립보 단장님 2 황국일(모세)2004.11.082766
479 12월 동영상 뉴스 양덕성당2007.12.082765
» 태평성당은 순교자의 성지(聖地)? 김형진(레오)2008.09.032764
477 이불 속의 컵라면 (묵상글) 함안Co.필립보2005.03.202750
476 기도 부탁드립니다 2 박종일 (프란치스코)2009.04.11272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25Next
/ 25
2024 . 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마산 치명자의모후 레지아
51727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북16길 27
전화 : 055-249-7115 , 팩 스 : 055-249-7086

Copyright (C) 2020 Diocese of Masan. All rights reserved.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