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1> 해설을 시작하며

by 제네시오posted Jan 3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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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1> 해설을 시작하며


2014.11.30발행 [1292호]



어느 시대이든지 교황은 시대의 징표를 읽고, 전 세계 신앙인들에게 참된 길을 제시하기 위해 끊임없는 가르침을 전달했다. 최근 교황들의 문헌만 떠올려보아도 쉽게 수긍이 간다.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베네딕토 16세 교황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가르침을 전달받았던가!



인내를 지니고 곱씹어보면,

 하나같이 주옥같은 말씀들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온전히 소화해낼 우리의 능력이 부족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중도에 포기하거나 목차와 부분적인 내용 파악으로 적당히 만족해 버릴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식견의 부족으로 그 내용의 깊이를 미쳐 다 가늠해내지도 못했고, 끝까지 읽어낼 인내력과 열정도 턱없이 모자랐다. 그래서 교황 문헌은 언제나 어려운 글로 뇌리에 남아 있다. 문화적 장벽과 번역의 한계 그리고 철학적, 신학적 이해의 부족 때문에, 늘 고리타분한 글로 여기기 일쑤였다. 때론, 마치 이솝 우화의 여우와 같은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못 먹을 위치에 있는 포도를 그저 신포도 정도로 규정하여 자존심을 챙기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래도 속이 불편해, 필자는 무의식 속에서도 웅얼웅얼 짜증을 냈다. 좀 더 편한 위치에 잘 익은 포도가 열리게 할 수는 없는 것인지, 늘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권고문을 통해 본 프란치스코 교황



2013년 11월 24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권고문을 냈다.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이다. 같은 해 3월 13일에 교황 직위에 오르셔서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놀라운 행보로 온 세상을 기쁨의 도가니로 만드신 분의 첫 권고문이다. 한국 교회에 교황 문헌 읽기 열풍을 일으킨 작품이다. 손에 잡히는 위치에 맺힌 포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알갱이의 감칠맛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역시 만만치 않다.



좋은 해설을 하실 분들이 세상에 많음과 필자의 부족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신문에서 내게 이 부탁을 한 것을 보면, 능력 있는 분들은 모두 겸손까지 갖춘 듯하다. 필자의 많은 흠 중에 하나가 거절을 못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 이것을 용기라고 여기는 분별력 결핍의 흠도 지니고 있다. 아무튼 만용으로 끝나지 않길 기도한다.



먼저 어떻게 해설을 써 나갈지를 밝혀 보겠다. 매회 마치 독립된 주제를 다루는 것처럼 끝마칠 수 있도록 하겠다. 신문의 속성 때문이다. 신문은 손에 잡힌 논문집이나 문학 작품을 독자가 원하는 시간만큼 읽어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의 기쁨」 원문의 내용에 충실하되, 사람들 공감을 이끌어 내는 감성적 표현에 집중할 것이다. 인내력을 지니고 끝까지 읽어나갈 추진력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필자가 한국 교회의 사목자이기에 구체적 상황을 적용할 때는 우리의 현실 상황에 비추어 설명할 것이다. 주관적 이해가 객관적인 것처럼 소개될 수도 있다. 그 판단은 독자의 몫이라 생각한다. 몇 회 분량이 될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차근차근 순서대로 써 나갈 참이다. 오늘은 권고문을 통해 느껴지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인상을 적어 보겠다.



새 교황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이목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키는 능력을 지닌 분이다. 현대 사회를 특징짓는 말 가운데 ‘소통’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분은 모든 사람들과 소통할 줄 아는, 아니 적어도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는 분으로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 그분 자신의 말과 가르침에 관심을 갖도록 만든다. 감성적인 언어로 공감을 형성시키고 고통받는 이들과 소외되고 배척된 이들을 향한 연대의 표시와 자세로 모두를 열광하게 만든다. 그래서 필자도 자연스레 그분의 평일 미사 강론까지 경청하며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까지 송두리째 표현하기에 참으로 설득력 있었다. 그 태도와 표정의 진지함은 진실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내면까지 훤히 보일 정도로 투명하게 속내를 보여주기에 상쾌함마저 느껴졌다. 오랜만에 맛본 감정이다. 식상한 정치인들의 외교적 수사와는 다른 것이었다.



권고문에 사용된 표현과 내용은 그분의 평일 강론이나 다른 곳에서의 인터뷰 내용 그리고 교황이 되기 전에 작성한 문헌의 내용과 표현을 그대로 담고 있다. 따라서 권고문은 그야말로 교황이 직접 작성한 것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다. 예술적인 상징과 이미지까지 이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아름답게 표현할 줄 아는 분이시다. 교황은 예술가를 정의하면서, 인간 삶의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실재를 아름다움으로 승화하여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교황도 훌륭한 예술가이다. 문학작품과 회화 그리고 음악과 영화까지 인용하시며 설명하신다. 대충 겉멋만 내지 않는다. 아주 구체적으로 표현하여 독자들에게 그 깊은 맛을 느끼게 한다. 필자에게 특별한 감동과 흥미를 유발시키는 부분이다. 그 내용의 깊은 맛과 인간적 멋스러움까지 노출시켜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 줄 아는 훌륭한 예술가이다.



솔직한 분이다. 용기가 있기에 가능하다. 그대로의 모습을 노출시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동안 교회 안에서 금기와 터부시 되었던 내용을 공개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다. 우리들 모두가 범죄의 말 없는 공모자임을 숨기지 않는다. 속죄하며 용서 청하고, 새롭게 시작하도록 격려하고 자극을 주신다. 계속해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분으로 비칠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