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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직 신학

교본 제15장 레지오의 선서문의 내용에 대하여 본 사이트의 묻고 답하기에서 뜨거운 토론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과 성모님을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토론 과정에서 언급된 최 경용 신부님의 교본 해설서의 내용과 그 해설의 기초가 되었던 벨기에의 '쉬넨스' 추기경님의 레지오 선서문 해설에 대하여 여러분들께서 참고할 수 있도록 아래와 같이 올려드립니다. 사이트의 개편 이후에 내용이 조금 큰 글들은 올릴 수가 없습니다.

........................

<최 경용 신부님의 교본해설>

레지오의 선서문은 정규 레지오 단원으로 등록되기 위해 성모께 의탁하면서 성령께 봉헌하는 기도문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선서문에 대한 개요와 선서문 해설로 나누어서 설명하고자 한다.



1. 선서문 개요



레지오의 선서문은 성령 신심과 성모 신심을 결합시킨 기도문이다. 프랭크 더프는 언젠가 성령강림 대축일에 맞추어 멜러리산에 있는 시토회 봉쇄 수도원에서 지냈다. 그 곳은 그가 교본 초안을 작성한 곳이기도 하다. 그는 성령강림 대축일에 갑자기 레지오 조직 체계 안에는 선서 제도가 있어야 하며 그 선서는 반드시 성령께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은총의 중개자는 성모이지만 은총을 베푸시는 분은 성령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레지오에 맞는 선서문을 만들어 1933년 2월 13일에 교회 당국의 승인을 받았다. 레지오 단원은 성모님을 본받아 성령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성령께 대한 봉헌을 가끔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레지오 선서문을 단원의 사사로운 신심 행위에 사용하는 것은 무방하지만 아치에스나 다른 행사 때의 봉헌 행위로 사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프랭크 더프는 자신의 성령 신심이 성모 신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성모로부터 그분의 배필이신 성령께로 향해야 한다. 성모가 계신 곳에 성령도 계신다. 성모는 성령의 활동을 밖으로 보이게 하는 분이다"고 하였고 "레지오는 성모를 통해 성령께 자신을 봉헌하는 선서문을 통해 성숙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선서문을 통해 단원들이 성령 신심과 성모 신심이 결합된 신심을 가질 것을 강조하면서 입단식 때 "마리아를 통하여 성령을 간구하는 레지오 단원들은 성령의 은혜를 풍부히 받을 것이다"고 하였다.



레지오 선서문을 몽포르의 성 루도비꼬 마리아가 지은 봉헌문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이 성인에 의하면 신자로서의 가장 중대한 세례 때의 선서이다. 마귀를 끊어 버리고 하느님만 믿겠다고 약속한 것을 신자들은 잘 지키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완전한 성모 신심은 세례 때의 서약을 갱신하고 성모를 통해 예수께 자신을 완전히 봉헌하는 것이라고 하였다(참된 신심 120항 ; 마리아의 비밀 28항 참조). 그런데 신자들은 이 성인이 제시하는 봉헌문에는 몸을 움츠리지만 그와 같은 정도의 봉헌을 요구하는 레지오 선서문을 거리낌 없이 낭독한다.



레지오의 선서문은 그리스도교 문학 작품에 있어서 성령과 마리아 그리고 사도직 정신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지닌 걸작품 중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 벨지움의 쉬넨스(Joseph Suenens) 추기경은 "현대에 있어서 성령께 대한 대중 신심을 심어 준 첫 번째 신심 단체는 바로 레지오 마리애"라고 하였으며 레지오 선서문에 대해 "현대 그리스도교 문학에 그러한 교의적 비중과 영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기도는 별로 없을 것"(쉬넨스 추기경 지음, 최익철 신부 옮김, 사도직 신학, 9쪽)이라고 하였다.



레지오의 선서문을 잘 알지 못하면 성령과 성모께 대한 레지오의 신심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교본은 선서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언하고 있다. :



"이 선서문을 풀이한 해설서로서는 쉬넨스 추기경이 쓴 「사도직 신학」이 있다. 여러 나라말로 출판된 이 귀중한 책을 모든 단원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한 모든 책임있는 가톨릭 신자려면 다 읽어야 한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 신자의 사도직을 지배하는 여러 원리를 훌륭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레지오의 선서문은 쉬넨스 추기경의 해설에 따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



"그리스도교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두 사랑의 교환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하나는 거룩한 계약을 실현하고자 하늘에서 내려오는 사랑이신 성령이시고, 다른 하나는 성령을 만나려고 땅에서 마중나가는 사랑이신 마리아이다"(쉬넨스 추기경 지음, 최익철 신부 옳김, 사도직 신학, 32쪽).



2. 선서문 해설



레지오 선서문을 풀이한 책인 「사도직 신학」(쉬넨스 추기경 지음, 최익철 신부 옮김, 크리스찬 출판사 , 1986, 제3판)을 간추려 교본의 레지오 선서문을 해설하고자 한다. 선서문은 대별하여 모두 다섯 대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 대목씩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대목 :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여, 저(성 본명)는 오늘 레지오 단원으로 등록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 홀로는 값진 봉사를 드리지 못함을 아옵기에, 비오니, 저에게 오시어 당신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의 보잘것없는 행위가 당신의 힘으로 지탱되어, 당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연장이 되게 하소서."



이 선서문은 성령을 직접 부름으로써 시작된다. 선서는 레지오 단원이 성령과 맺는 계약이기에 단원은 자신이 성령의 도구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먼저 자신이 사명을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임을 성령께 아뢴다. 자신의 부족함과 비어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성령께서 부족함과 빈 곳을 채워 주시기를 간청한다. 성령은 겸허한 단원을 당신의 도구로 쓰신다. 겸허한 단원으로서 성령의 도구가 될 때 비로소 이웃을 위한 봉사가 값지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성령의 충만하심과 위대하심이 단원 자신의 비어 있음과 보잘것 없음에 작용하여 인류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게 된다. 그러기에 단원들은 레지오의 시작 기도에서 "오소서 성령이여, 믿는 이들의 마음을 가득히 채워 주소서"라고 합송한다.



둘째 대목 :



"당신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고자 오셨으되,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 하시기를 원치 않으셨음을 아옵기에, 우리 또한 마리아 없이는 당신을 알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함을 압니다. 마리아를 통하여, 마리아께서 원하시는 이에게, 마리아께서 뜻하시는 때에, 마리아께서 바라시는 만큼, 마리아께서 즐기시는 방법으로, 당신의 모든 은사와 덕과 은총이 베풀어짐을 압니다. 완전한 레지오 봉사의 비결은, 당신과 하나가 된 마리아께 온전히 결합하는 데 있음을 저는 깨닫습니다."



이 대목은 성령과 마리아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언급함과 동시에 은총에 있어서 성모 마리아의 보편적 중재를 밝히고 있다. 성령과 성모와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맺어진 두 사랑의 계약이다. 즉 성령은 인간 쪽으로 내려오는 하느님의 사랑이고 성모는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순결한 사랑으로서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인간적인 사랑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심을 믿으며"라는 사도신경의 내용처럼 두 사랑이 만나는 지점으로서 계약의 매듭이다. 성령과 마리아는 똑같이 사람들 안에 그리스도를 만드신 분이시다. 마리아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중재도 하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중재도 한다. 다시 말해 마리아는 사람들을 성령께로 인도하는 분인 동시에 성령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분이다.



레지오는 은총에 있어서 성모의 보편적 중재를 성교회와 함께 믿고 있다.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1921년에 모든 은총의 중재자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의 미사와 성무일도를 윤허하고 5월 31일에 지내도록 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4년에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서 천주의 모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역할을 설명하였고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성에 예속된 복되신 동정녀의 중재의 뜻과 힘을 밝혔다(교회 헌장 60항 참조). 1971년에는 경신성이 '은총의 어머니요 중재자이신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라는 호칭의 미사 경문을 인준하였다. 이 미사경문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라츰에 충실하고 성모의 모성적 역할과 중재의 임무를 함께 기념하면서 축일을 5월 8일에 지내도록 하고 있다(주교회의 전례위원회 편찬, 성모 미사 경본, 1988년, 135쪽 참조),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과 배려에 의해 모든 은총의 중재자요 분배자가 되신 분이다. 그리고 은총과 결부된 완전한 레지오 봉사의 비결은 성령과 하나가 된 성모 마리아께 온전히 결합하는 것임을 레지오 단원은 깨달아야 한다. 마리아와의 일치는 하느님께로 가는 길인 동시에 이웃에게 가는 길인 까닭이다.

...................................................



<쉬넨스 추기경님의 사도직 신학의 일부>



사 도 직  신 학



<레지오 선서문 풀이>        - 쉬넨스 추기경 지음 / 최 익철 신부 옮김 -



머리말



레지오 마리애는 더블린에서 1921년 9월 7일 성모성탄 축일 저녁기도 때 조용히, 그리고 단순하게 태어났다. 그 때 15명이나 되는 사람이 <미라 하우스>에 모여 주님께 봉사할 길을 보색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성모상 앞에 꿇어 묵주의 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께서 좋은 생각을 일으켜 주시고 잘 인도해 주시기를 간곡히 기도하였다.



어떤 사도적 임무가 맡겨질지 더구나 어떤 방법을 써야 할지 몰라도, 한없는 신뢰심을 가지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좋은 일을 하실 것이다.



지극히 거룩한 동정녀께서는 옛날에 예수께서 한 아이가 많은 무리를 먹이도록 내놓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신 것처럼, 이 봉헌을 기쁘게 받으셨다. 그리고 손수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보이셨다.



이 첫 핵심체는 레지오 마리애가 되고, 본심에서 힘차게 우러나는 마음만으로 25년 동안 5대양에 퍼져 나갔다. 어디서나 남녀를 막론하고 아주 자유롭게 맨 처음에 하던 행동을 그래로 거듭하였다. 즉, 다 함께 무릎을 꿇고 사람들 사이에서 은총의 어머니 노릇을 할 수 있도록 마리아께 자신들을 봉헌하였다. 이것이 오늘에 이르러 마리아를 그들의 단장으로 선언하는 마리아의 거대한 군단이다. 소집된 이들의 함성은 교회가 성모 승천 대축일 때 천사들에게 하는 함성이기도 하다.  즉,



첫새벽의 태양과 같이 올라오고(먼동이 트이듯 나타나고),

달과 같이 아름다우며(아름답고),

해와 같이 빛나며,

싸움터에서 잘 정돈된 군대와 같이 무서운 자는 그 누구뇨?

(군대처럼 두려운 저 여인은 누구실까?)



승리를 거두려면 군단장과 그 군사들 사이에 영혼의 계약이 체결되어야 한다. 중세기 기사들에게 국가적 봉사를  하는 사람으로서 이들을 선택하고 그 때의 특별한 선서가 어떠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마리아 군단의 단원도 역시 선서하는 말의 기쁨과 감동을 잘 알고 있다.



손에 벡실리움 깃대를 쥐고 자기 형제들 속에서 하는 선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연결시키는 하나의 충실성의 계약으로서, 있는 것과 가진 것을 다 바치게 한다. 그것은 또 성모께서 좋거나 나쁘거나 다 받아들이게 하는 계약으로서, 그 나라 확장에 헌신하게 하고 가장 긴밀한 일치에로 향하는 마음을 굳건하게 한다.



이 선서문의 낱말들은 그 뜻이 깊고 그 결과는 풍부해서 어떤 말은 동판처럼 마음에 박히게 된다. 거죽만 번드레하게 해서는 안 되고 기억과 마음 깊숙이 삭일만한 낱말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보라! 왜 이 책을 쓰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했는지! 이 책은 단원에게 그 선서가 어떤지 잘 이해시키고 이를 잇는 문장의 뜻을 더 깊이 파헤치고 찾아내어 체계를 완전히 세우려는 데에 있다. 우리는 현대적 그리스도교 문학에는 그런 교의적 비중과 영적 반향(反響)을 가진 기도가 별로 없는 줄 알고 있다.



중점을 중점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제시하는 모험을 할 각오를 해야 하고, 자신을 고무하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는 것을 꺼리지 않는 사람만이 선서의 뜻을 다 해득할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말은 이미 들었고 다른 말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계약을 쾌히 수락하는 사람이나 몇 해를 두고 이로써 사는 사람은 그 진의를 해득할 것이다.



그러므로 단원은 이 선서를 체험하고 점차적으로 관철하도록 해야 한다. 이 선서문을 읽고 또 읽기를! 우리는 이 책을, 선서를 하러 오는 새 단원에게는 하나의 안내서로서 주고 싶고, 기성 단원에게는 피정 때나 선서 갱신 때 샘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하나의 권고로서 제시하는 바이다. 새 단원에게나 기성 단원에게나 우리는 이 책을 속성으로 읽기만 하지 말고, 찬찬히 읽으면서 기도하기를 바란다. 즉, 이 책을 읽기 전에 홀로 우리를 도와주실 "하느님의 깊이를 찾고" 맛들이게 하실 수 있는 성령께 기도한 다음 읽기를 바란다.



그리고 읽은 다음에도 성령께 관대하게 순종하는 마음과 전교에 헌신하는 생활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구하는 기도로써 마치기를 바란다. 그 이유는 순간마다 우리들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리아를 통해서 마리아 안에서 성령께 자헌 한다면 그것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고, 사도행전이 계속되기 위해서다. 예수께서도 "나는 세상에 불을 놓으러 왔으니 타는 것 외에 무엇을 더 원하리오!" 말씀하셨다.



이 불 그것은 바로 성령이시다. 레지오 단원은 이 성령께 자기 영혼을 하나의 햇불로 삼아 그 불길로 다른 영혼들을 타게 하고, 세상에 불을 놓으시게 하려는 생각만을 가지고 헌신하여야 한다.



★ ★★



선서문의 풀이인 이 책자는 그 풀이 이상의 것이 되었으면 한다. 그것은 또 동시에 레지오 적 성성(聖性)자체를 도입시킨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이 책자는 레지오 단원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폭넓게 자리 잡고 전교를 해서 자기 영혼을 가르치려는 수많은 이들을 위해서도 쓰인 책자이다. 그만큼 이 전교 운동이 나날이 돋보이고 있는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는 30년 동안 살아왔고 경험도 해왔지만, 아직도 초창기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1921년 아일랜드에서 생겨난 레지오 마리애는 7년 후인 1928년에야 겨우 국경을 넘어서 영국에 옮겨졌고, 그 후 인도와 미국에 세워졌다. 또 유럽 각국에 들어가기도 전에 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에 먼저 들어갔다.



현재 레지오 마리애의 기도문은 거의 70개 국어로 염해지고 있고, 그 단원들은 몇 백만을 헤아리고 있다. 7백여 명의 주교들이 이를 환영하고 그들의 증언은 크게 주목을 끌고 있다.



중국의 교황 대사<리베리>주교는 중국에 있는 각 주교들에게 이 군단을 교회의 일종의 영적 제후(諸侯)로서 각처에 창설할 것을 호소하고 이를 "현대의 기적"이라 불렀다.



이에서 생기는 한 가지 질문은 그것이 무엇이며, 그 운동이 어떠하며, 성공의 열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바로  이 질문에 레지오 마리애의 근본사상과 그 영성을 분석하면서 답변하련다.  영성이란? 말이 레지오의 무슨 전매품이거나 또는 어떤 특징을 주장하는 열쇠라 생각해도 좋다. 사실이지 밝히 말해두지만 레지오는 그저 정상적이지 <어중간>이 아니다.



오늘에 이르러서 정상적 가톨릭시즘 이라면 흔히 남의 구령(救靈)에는 이렇다 할 만한 관심은 없고, 그저 자기 개인적 이익만을 생각하는 종교 생활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은 충실한 가톨릭 신자를, 다시 말해서 가톨릭시즘을 희롱하는 말이다.



중간적 가톨릭은 정상적 가톨릭이 아니다. 좋고 열심한 신자에 대한 개념은 엄격한 비판과 논의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만, 최소한도의 전교를 한다 해서 신자로 인정되지는 않으며, 최후 심판거리가 될 이 피치 못할 최소한도의 전교나마 소위 열심하다는 우리 가톨릭 교우들이 아직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으니, 모든 비극이 여기서 빚어지고 있고 여기에 근본적 오해가 깃들어 있다.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여기서 레지오의 근본 사상인 전교 의무에 언급한 것은 마리아께 대한 신심에 대해서도 거듭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레지오는 교회 못지않게 마리아를 많이 사랑하고 있다. 레지오는 성당 한 구석에서만 기도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성당 중앙에서 기도하려 한다.



그런데 마리아가 그리스도교의 중심이고 그 신자들은 성령과 마리아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듯 태어난다고 선포한 것이 레지오는 아니다.



"레지오는 그저 그리스도적 신심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성모님께  대한 정상적 신심을 실천하는 것으로 알 뿐이다. 이 야심을 더 크게 가진다면, 또 자헌을 이런 열성으로 한다고 보면,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 안에서 단신 모친을 계속 사랑하고자 하시는 것이고 그분이 우리의 자녀적 사랑을 당신의 자녀적 사랑의 정도로 커지게 충동한다는 것이다.



특히 잊어서는 안 될 점은, 하느님의 아들이 마리아의 아들이 되고자 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친히 천만인 중세서 선택하신 당신 모친을 비할 바 없는 사랑으로, 즉, 천사들과 성인들 전체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점이다. 그 모친께 세라핌에게도 주시지 않은 특은을 주시고 당신 구속 사업에 유일무이한 이로서 참여시킨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현대 교회에서 언제나 커가는 마리아의 영광을 주관하시는 분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디아 2,20). 내가 마리아를 사랑할 때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은가?



우리는 그리스도께 그 인성(人性)에 "보태는 인성"이 되었기 때문에 성모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가 될 뿐, 언제나 새롭게 우리 안에서 이 사랑을 실천하고 나타나는 분은 그리스도시다. 성 바울로는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 1, 24)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 자신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결함될 바가 하나도 없지만, 그리스도의 지체로서는 바울로에게 무엇인가가 결함되어 있었다. 이와 비슷한 의미로 그 모친께 대한 그리스도의 자녀적 사랑의 결함을 나 안에서 보충하고 완성시킨다.



레지오는 그저 마리애의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려고 전력을 다하듯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마리아를 사랑하려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계획이요 뜻인 까닭에, 레지오는 이를 겁내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잠잠하지도 않고 그저 신앙으로 받아들인다.



교의 면에서도 레지오는 정통적 전통에 충실 한다는 것 외에 별다른 독창성을 내세우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레지오적 성성(聖性)이란 말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교회의 자녀들 전체에게 공동적인 유산 안에 들어있는 사상을 뚜렷이 밝히기 위해서다. 이를 위한 그 한두 가지 요구 때문에 어떤 충격을 준다면 그것은 무슨 특별한 것을 바라는 의도에서 보다는 수액(樹液)이 가득찬 그리스도교대로 살게 하려는 마음에서 생기는 하나의 결과다



소위 열심하다는 많은 교우들이 왜 영세를 아니 한 사람처럼 한심스럽게 살아야 하나?



그리스도교를 우리의 가치 판단대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으로 평가한다면 그 가치판단이 얼마나 달라질까?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수하게 그대로 살기만 한다면 얼마 나한 혁신을 가져올 갓인가!



레지오는 다음과 같은 무게 있는 질문, 즉"이 20세기에서 산을 뒤흔드는 신앙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에 그렇게 한 사실로서 대답할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 전설같이 아름다운 - 레지오의 역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게만 되면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 진다" (마태 11,5)고



이 복음화 사업의 기초가 되는 원리는 전교 활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라면, 그것이 일반적이거나 특수하거나 간에 다 통용된다. 강생 자체의 연장(延長)인 전교는 언제나 어디서나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이루어진다." 전교의 관점이나 그 실현방법이 다소 다를지는 몰라도 감도하심이나 근본적 활력은 모든 이에게 공통적이다.



모든 영적 현실처럼 평신도 사도직도  두 가지 면을 나타내고 두 개의 세계로 나누어 보고 있다. 그 하나는 지상을 향해 보는 인간 면으로서 사도는 다른 인간과 그 위치와 환경에서 시대를 고려하면서 무한히 활동한다. 여기에는 영원한 말씀의 적절한 활용이 요구되고, 따라서 영적 개간을 할 여러 가지 조건에 대한 지식도 요구된다. 이제 전교 활동의 또 한 면은 전교의 영적 면이어서 그 법은 교회 자체처럼 불변하고 보편적이다.



이 책에서 취급한 면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제목을 "사도직 신학"이라고 불였다.



한 말로 말해서 진정한 전교는 모두 마리아적이다. 레지오 마리애가 이 원리의 살아 있는 화신이라 해서 레지오는 그 독점성을 고집하지 않고 자기와 마찬가지로 필요한, 또 같은 생명의 샘에서 갈증을 풀어야 할 다른 모든 단체와도 사이좋게 지내려 한다.



이 책에서 말한 교의(敎義)가 주의 포도밭에서 나란히 수고하고 있는 모든 일꾼들을 돕고, 그들에게 일할 의욕을 북돋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1953년 성모성월에 지은이





제 1 장    성   령(聖 靈)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저(성명과 세례명)는(은)

  오늘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 등록되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러나 저 스스로는 합당한 봉사를 드릴만한 능력이 없사오니

  저에게 오시어 저를 당신으로 채워 주소서.

  제가 하는 보잘 것 없는 일들을 당신 힘으로 받쳐 주시며

  당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해 주소서

  당신은 이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려고 오셨으나

  성모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서는 역사하지 않으시고

저희 또한 성모 마리아 없이는 당신을 알아 뵈올 수 없고  사랑할 수도 없음을 아옵니다.

당신은 저희에게 모든 재능과 성덕과 은총을 내려 주시 오나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때에,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만큼,

성모 마리아가 원하시는 방법으로,

베풀고 계심을 제가 아옵니다.



또한 제가 레지오 단원으로서 충실하게 봉사하는 비결은

당신께 완전히 하나 되어 계시는 성모 마리아와 온전히 일치하는 것임도

잘 알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사실을 우리 눈앞에 드러내 보이는

레지오 단기를 손에 쥐고(선서하는 단원은 이때 벡실릴움 깃대를 자신의  

오른손으로 잡고, 선서가  끝날 때까지 그대로 유지한다.)



저는 지금 성모님의 병사요 자녀로서 당신 앞에 서서,

성모님께 온전히 의탁함을 선언하나이다.

성모님은 제 영혼의 어머니시옵니다.



성모님의 마음과 제 마음은 하나이오며,

  이 하나인 마음으로

'주님의 종이오니'라고 다시 사뢰오니,

당신은 성모님을 통하여 큰일을 하시고자 다시 오시나이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당신의 권능으로 저를 감싸 주시고 제 영혼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시어

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성모님의 사랑과 뜻에 일치하게 해주소서.

당신의 권능으로 티 없이 되신 성모님 안에서 저 또한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제 안에서도 자라시게 해 주소서.

그리하여 더 또한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함께

이 세상과 영혼들에게 그리스도를 모셔다 드리게 해 주시고

그들과 제가 이 세상 싸움에서 이긴 다음 성모님과 함께

복되신 성삼위의 영광 안에서 영원히 살게 해 주소서.



오늘 저는, 당신께서 저를 받아 주시고 저를 써 주시며,

저의 나약함을 굳센 힘으로 만들어 주시리라 확실히 믿으며 다짐하나이다.

저는 감히 레지오의 대열에 한 자리를 차지하여 충실하게 봉사하겠나이다.

저는 레지오 규율에 온전히 복종하겠나이다.

이 규율은 동료 단원들과 저를 하나로 묶어

군단을 이루도록 하며,

또한 성모님과 함께 진군하는

우리의 대열을 가다듬어,

당신의 뜻을 이루고 은총의 기적을 일으키게 하나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땅의 얼굴은 새롭게 되고

온 누리에 하느님의 나라가 펼쳐지게 될 것이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Ⅰ. 하느님의 사랑의 성질(性質)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저(성명과 세례명)는(은)

오늘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 등록되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러나 저 스스로는 합당한 봉사를 드릴만한 능력이 없사오니

저에게 오시어 저를 당신으로 채워 주소서.

제가 하는 보잘 것 없는 일들을 당신 힘으로 받쳐 주시며

당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해 주소서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이 선서문은 성령을 직접 부름으로서 시작되고, 모든 계약은 이 성령과 직접 맺어진다.

성령께서는 마침이시듯 시작이시고, 언제나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될 사랑이시듯  

세상을 생기게 한 사랑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레지오 단원의 마음은 자기 일생을 내거는 이 마당에서 자연히 성령께      

로 향하게 된다. 이 단원은 자기 봉헌이 하나의 응답에 지나지 않고, 자기 사랑이 하나의 감사요, 그분 사량에 대한 애착에 불과함을 잘 안다. 그는 또한 당신 자신을 먼저 내어 주신 분에게

자신을 내맡긴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 때문에 우리 마음의 모든 정열을  

요구하신다. 이 선서에서는 우리가 계약하는 것이 아니다. 땅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무상(無償)으로 또 자유롭게 땅에 내려온다. 이에 대한 인간의

배은망덕한 행동을 보면 "미쳤다"고 말해도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와의

관계에서 하느님은 얻으시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당신의 내적 충만  

성이 조금이라도 손실된다거나 혹은 당신 자신이 더 위대해지시거나, 부유하게 되실

수조차 없는 사랑이었고, 아주 후하게 또 아낌없이 당신 자신을 주시며, 상통하게

하시는 영원한 사랑이시다.

더욱이 놀라운 일은 하느님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다.



아무 것도 하느님께 드릴 수 없고, 그분 영광에 아무 것도 보탤 수 없으며, 그 만복과  

그 기쁨을 더하게 할 수도 없는 우리들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대가 없이 또 무한한

아량을 가지고 단독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신다.

사람은 어느 누구를 위해 자기 생명을 희생할 때, 곧 자신을 포기함으로서 도리어  

자신이 풍부하게 되고, 자신을 낮추고 소모시킴으로서 위대해진다.

좋아하든 말든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행위란 우리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 은 하느님의 속성(屬性)이다. 당신은 우리를 사랑하셔도 이런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 하신다. 얼마나 마음을 후련하게 하는 진리인가!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의 유일한

원천(源泉)이 당신 안에 있고, 또 사랑할 이유가 사랑 말고 다른 이유가 없다면,

우리의 가련함도 실수도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느님의 자애하심을 흔들어 놓을 수

없다. 그분의 사랑은 하나의 응답이 아니라 먼저 하는 사랑이며, 우리 자신의 선심에

좌우되지 않고 오히려 우리에게 사랑할 만한 것을 만들어 주고 사랑할 마음을 일으켜  

준다. 그 사랑은 지금까지 없었던 힘을 주고, 곧 하느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사랑하게

한다.



프랜씨스 톰슨(Francis Thompson)은 이 사랑을 다음과 같은 불멸의 시(詩)로서 드높였다



얄궂고 가련하고 허무한 피조물이여,

누가 사랑의 한 몫을 내게 간직하려 했더냐?

나 홀로 무에서 많이 만들었노라.



그리고 인간의 사랑은 인간의 공로가 있어야 하는데

넌, 진흙더미에서 생긴 너는

어떻게 사랑을 받을 만 하겠느냐?



아 ! 슬프게도

네가 내 사랑을 받기에 얼마나 부당한지

너는 모르고 있도다.



네 가련함을 좋아할 사람이

나, 나 혼자만이 아니면 누구 이겠느냐?



Ⅱ 성삼(聖三) 안에서의 성령(聖靈)의 개별적 역할



우리가 맨 처음 깨달아야 할 것은 바로 성령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영보의 날, 마리아에게 오셨을 때도 이 창조적이고  임금다운 사랑으로 마리아를, 또 마리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셨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교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두 사랑의 교환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즉, 성스러운 선서를 실현시키고자 하늘에서 내려오는 사랑이신 성령과, 이를 만나려고 땅에서 마중 나가는 사랑인 마리아이시다.



마리아 안에서 하느님의 성령을 만나러 마중 나가는 이 사랑은 틀림없이 하느님의 사랑

자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다른 어느 피조물과는 달리 천사의 은총을 충만히 받으셨고, 따라서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시고, 하느님의 신비로운 부르심에 적극 응하신다.



마리아의 역할(役割)은 정녕 성화된 피조물로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소극적으로 응답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서 마리아는 구약의 하느님께서 여러 세기를 두고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육성시키기 위해 이룩하신 업적 가운데 최고의 꽃이요, "진리와 성덕으로 성화된" 배필이시다. 마리아로 말미암아 "땅은 제 열매를 맺고 구름은 구세주를 비 같이 내려 보냈도다"라는 구약 전체에 걸쳐 있던 이 허원, 이 서약과 선서가 이루어진다.



하느님과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 즉 인류가 만나게 되는 교차점은 어느 모로 보나 강생(降生)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황송하지만 마리아를 그늘어 덮으실 성령을, "천사들도 보고싶어 하는"(Ⅰ베드1,12)그분의 신비를 가까이에서 뵙고 생각하도록 하자.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일이지만, 확실히 밖으로 행사신 하느님의 업적(業績)은 삼위에게 공통되는 것이고, 우리를 감싸고 스며드는 하느님의 사랑은 세 가지인 동시에 단 하나의 선물이요 사랑이시다. 그러나 성령의 역할이 다른 두 위(位)의 역할에 포함된다 해서 성령 자신이 성삼 안에 숨겨져서 없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시다.



외부로 나타나는 하느님의 업적들은 성삼에게 공통되는 것이지만, 그 삼위는 각각 뚜렷하게 개별적이요 서로가 아무도 결코 대치할 수 없는 역할을 따로따로 하신다.



또 의심 없이 성령은 혼자만이 우리를 성화시키거나 다른 두 위를 배척하고 따로 행 하시지도 않는다. 성부도 우리를 성화시키시고, 성자 역시 그러하시다. 그러나 각 위마다 성화시키시는 모양이 다르다. 성부는 아버지로서 성자와 함께 성자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는 분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그러나 성령은 그분들의 상호적인 사랑의 힘으로 그분들의 최고 선물이 되신다. 성령을 받으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친밀한 가족의 하나가 된다.



아타나시오 성인은 "성부는 샘이요, 성자는 샘 줄기이며, 우리는 성령을 마신다"고 하였다 희랍 교부(敎父)들은 그 후부터 이를 천만 가지로 다투다시피 반복하였다.



또 우리는 성령을 하느님의 생명의 안내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은 성부와 성자와의 일치에서 오는 열매이시나, 또한 하느님과 사람들을 특히 하느님과 마리아를 이어 주는 매듭(관계)이시기도 하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내미시는 손과도 같고, 그분을 통하여 우리는 성부와 성자를 차지하게 된다.



모든 것은 성부에게서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나온다. 이 원리(原理)는 동방 가톨릭 문학에 있어서 중심 사상같이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성교회 전체도 그 전례 적 순환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따로따로 지향하도록 대림시기와 사순시기, 강림시기로 나누어서 이 성삼(聖三)의 적극성을 나타내고, 우리를 하느님의 내적 생활로서 살게 하였다.





Ⅲ 교회 안에서  성령의 개별적 역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제자들과 헤어지실 무렵 그들의 마음을 성령께로 향하게 하셨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요한16, 7)



성령은 예수님의 숭고한 약속이시며 당신 현존(現存)과 승리의 보장이시다. 성령 강림 날, 성령이 다락방에 모여 있던 사도들 위에 내려 오셨을 때, 세상은 신세기(新世紀)를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성령의 세기요, 만기(滿期)다. 엄밀하게 말해서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역사의 최종단계에 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시작은 성령이 하신다



바로 이 성령이 이제 갈릴레아 어부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이들을 사도가 되게 하시며, 초창기 신자들을 특은으로 가득 채우시고, "신덕과 성령이 충만한" 성 스테파노를 비롯하여 많은 순교자들에게 아무도 저항할 수 없는 당신의 힘을 주신 것이다.



성 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사도행전을 달리 말해서<성령의 복음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령 강림 날, 처음으로 대중과 접촉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언자 요엘의 말을 성령께 부합시켰다.



"이것은 예언자 요엘이 예언한 대로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의 성령을 부어 주리니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계시의 영상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다....... 나는 하늘 높은 곳에서 표징을 보이며,...... 마침내 영광스러운 주의 날이 오리라'"(사도 2, 16-20)



성령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위엄을 나타내 보이실 재림 때까지 활동하고 계신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 페이지마다 역사를 서술하고 거기에 이름이 실린 사람들보다 더 절박하게 또 더 활발하게 일하시는 성령을 느끼게 된다.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을 보배롭고 보장된 분으로 말하고 있다. 성 루가가 성령을 꼬집어서 말하지 않을 때라도 그분이 각 페이지마다 완연하게 나타나 계심을 은방(銀房)사람처럼 알아낸다. 그분은 전교활동을 이끄시고 이를 아무도 모르게 엮으신다.



법정에서나 지방 총독 앞에서나, 로마 통치자들 앞에서 하는 설교에서처럼 할 말을 하게 해 주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성 바오로는 나중에 "내가 말을 하거나 설교를 할 때에도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과 그의 능력만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이 인간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능력에 바탕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Ⅰ고린 2, 4-5)라고 말했다.



어느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중인으로 축성하시는 이도 성령이시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1, 3)



사랑의 마음을 들추어내고 성화시키는 이도 성령이시니, 그분을 속이면 벌을 받는다.

"왜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 성령을 속이고 땅 판 돈의 일부를 빼 돌렸소?"(사도5, 3)



사도들을 대담하게 하시는 이도 성령이시다. 그 때에 성령이 필립보에게 "가서 저 마차에 바싹 다가 서 보아라"(사도8, 29), 혹은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의 성령이 필립보를 어디론가 데리고 가셨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볼 수 없게 되었다."(사도 8, 39)



베드로는 고르넬리오의 집으로 인도하신 이도 성령이었다. "어서 내려가서 주저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거라. 그들은 내가 보낸 사람들이다.(사도10, 20)



사도들을 선택하신 분도 바로 성령이시다. "그들이 단식을 하며 주님께 예배드리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내가 그들에게 맡기기로 정해 놓은 일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사도 13, 2)



성령은 박해를 받는 자들의 기쁨이시오 보증이시다. "신도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도 13, 52)



새로 창설된 교회의 장래를 좌우하는 결정을 짓게 하시고 사도들로 하여금 지시할 것을 일러 주게 하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곧 "다음 몇 가지 긴요한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더 지우지 않으려는 것이 성령과 우리의 결정입니다."(사도 15, 28)



사도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시고 이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이도 성령이시다.



"그들은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프리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두루 다니다가 미시아에 이르러 비티니아 지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예수의 성령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사도 16, 6-7)



성 바오로는 "이제 나는 성령의 지시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인데 거기에 가면 내가 어느 도시에 들어가든지 투옥과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나에게 일러 주신다는 사실입니다."(사도 20, 22-23)



이만하면 초대 교회가 어떠한 현실주의로 성령께 대한 신앙을 표명하며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이 교회는 어느 날, 에페소에서 성 바오로가 모였던 제자들에게 질문했을 때 그의 태도를 의아하게 놀랬던 그런 놀라움을 갖기를 명한다. 즉,"당신들이 신도가 되었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사도19, 2)



하고 물었을 때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조차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 때 성 바오로는 그 말이 곧이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러면 당신들은 어떤 세례를 받았습니까?"(사도19, 3)하고 반문하였다.







유감스럽게도 그와 같은 질문을 우리가 접하고 있는 숱한 신자들에게 반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물과 물로서 세례를 받은 줄이나 알까? 그리고 이 불은 타야하고 그들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을 차츰차츰 가까이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을까? 성령께서 전적으로 헌신하는 레지오 단원의 선서는 우리가 천주 제삼위께 흠숭할 마음을 기르고, 이 분을 우리에게, 우리 자신들보다 더 친밀하신 하느님으로, 우리 영혼의 영혼으로, 또 우리의 숨길(呼吸)과도 같은 분으로 분명하게 알려 주고자 한다.



이 선서는 또 각자가 클로델(Claudel)이 하느님을 발견해서 "보소서, 주님을 정말 보통 분이 아니십니다."라고 외친 말을 성령 앞에서 외쳤으면 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계획에 순종하고 열광적인 자녀로서 사도행전이 계속되도록 자기 마음을 하느님의 사랑 전체에 열어 보이려는 것이다.



이 항목을 마치면서 추기경 멜시에(Mercier)가 말년에 공개한 감격적인 다음 말을 인용하려 한다.



"저는 이제 여러분에게 성덕과 행복의 비결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매일 오 분씩만 마음을 가다듬어 지상의 물질에 눈을 감고, 세속의 번거로운 일에 귀를 막고, 성려의 궁전인 여러 분의 세례 받은 영혼의 지성소에 들어가 그 성령께 간절히 구하고 청하되, 다음과 같이 기도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오! 저의 영혼의 영혼이신 성령이여, 나 당신을 흠숭하오니 저를 비추시고 인도하시며, 견고케 하시고 위로하시며, 또 해야 할 것을 알려 주시고, 저에게 명령을 내리 소서, 저는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에나 복종하고, 당하게 해 주시는 것은 무엇이나 다 받기로 약속하오니, 다만 당신 성의(聖意)만 알게 하소서."



이렇게 하며, 여러분들의 한 평생은 복되고 안온하고, 고통 중에서도 위로를 받는 생애가 될 것입니다. 은총이란, 시련을 받아낼 만한 힘을 주되, 시련을 받는 그만큼 주기 때문이요, 따라서 공로를 많이 쌓아 천당 문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령을 따르는 이 복종이야말로 성덕의 비결인 것이다.



Ⅳ. 하느님의 활동에 대한 존경심



그러므로 이 선서(宣誓)는, 바로 성령께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과의 대화를 시작하면서 그분께 무슨 말부터 먼저 해야 할까?

이 대화에서는, 예컨대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기별하는 천사에게 마리아가 가지셨던 경건한 마음을 자아내고, 여기에 계속 잠겨있게 하는 그런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선 성령께서 이제 우리에게 맡겨 주실 사명을 받기에 부당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오늘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 등록되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그러나 저 스스로는 합당한 봉사를 드릴만한 능력이 없사오니

저에게 오시어 저를 당신으로 채워 주소서.

제가 하는 보잘 것 없는 일들을 당신 힘으로 받쳐 주시며

당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해 주소서.



우리가 누리는 만족은 그 무엇이나 다 우리의 공허함을 채울 수 없고, 없는 가운데서라야 하느님께서 무엇이든가 만드시기에 알맞다고 여기시므로 성령께 우리의 빈 것을 드린다. 우리는 우리의 비천함을 알고 성령께 허약함과 비겁함과 수없이 불충실한데 대한 솔직한 고백을 한다. 우리는 성령께 다음 기도를 교회와 함께 하려는 것이다.



임 하소서 빈곤자의 아버지시여

더러운 것을 씻으시며

병든 데를 고치시고

마른 곳을 적시며

굳은 마음을 녹이시고

냉한 마음 덮히시며

우리 발길 이끄소서



우리는 어째든 성령과 같을 수 없다.  빈손을 채워주시는 일은 성령이 하실 일이지만, 우리는 다만 채워 주신 것을 남에게 전할 뿐이다. 우리를 성령 칠은과 은사로서 흘러넘치게  해 주는 것뿐이다. 성령은 우리를 직접 배불리시고 우리는 그저 우리 형제들과 나눌 뿐이다. 바위 속을  파고 든 다음, 바위 둘레에 있는 평지를 물바다로 만드는 도량 같이 우리를 휩쓰는 일도 성령이 하시는 일인데, 우리가 할 일은 인간적 견해를 벗어날 아량 있는 마음, 그리고 자신을 고집하지 않는 마음을 성령께 바치는 것이다.



성령은 마리아에게 내려오시어 그 안에서 세상의 구원을 새롭게 하셨을 때, 마리아의 영혼을 넘치게 하신 유일한 은총을 우리 안에서도 계속 넘치게 부어 주신다. 우리가 할 일은 마리아의 신비에 계속 잠겨 있는 것이다.



오! 이렇게 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사도적 오만을  멀리하게 되고, 하느님의 활동을 막으려 들며 인간적 모든 지혜를 내세우는 소위 개혁자들도 멀리하게 된다.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 같지 않고,

나의 길은 너희 길 같지 않으리라,



하느님께서 함부로 따지며 대든다 해도 자기중심주의로 사는 자에게 하느님께서는 어느  때나 대꾸할 여지없이 다음 말씀을 하시지 않았던가!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나 이제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해 보아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그렇게 세상 물정을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했느냐?

그 누가 줄을 치고 금을 그었느냐?

어디에 땅을 받치는 기둥이 박혀 있느냐?

그 누가 세상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그 때 새벽 별들이 떨쳐 나와

노래를 부르고

모든 하늘의 천사들이 나와서

합창을 불렀는데.......

네가 언제고 동이 틀 것을

명령해 본 일이 있느냐?

새벽의 여신에게

'이것이 네 자리다' 하고

일러 준 일이 있느냐?......

네가 바다 속 깊이 더듬어 내려가

바닷물이 솟는 샘구멍까지

찾아가 보았느냐?......

네가 넓은 땅 위를 구석구석 살펴

알아보지 못한 것이 없거든,

어서 말해 보아라." (옵기38, 2-18)



아니, 우리는 이것저것 다 모른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처럼 그 하시는 업적 앞에서도 머리를 숙이는 수밖에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뜻밖의 영예를 주신다면, 그 분만 이 홀로 그 목적과 그리로 인도하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



사도가 되려는 자는 자신의 힘으로는 마땅한 봉사를 한다거나, 지리를 전혀 모르는 지방에 가는 모험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이런 사실은 영혼들과 접촉할 때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특히 실패했을 때, 그리고 우 리가 신앙에 대한 시련을 겪는다든가 실패에 대한 불평을 하려고 할 때,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다.



우리는 어차피 암흑 속을 걸어갈 것이다. 그런 영혼을 구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당장은  별 반응도 없이 마냥 은총에 귀를 막고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영혼은 전혀 애쓰는 일도 없었는데 뜻하지 않게 우리를 만나고, 제 발로 찾아와서 아주 수월하게 귀의 하는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렇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위에서 말한 중대한 이유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지나는 길에 무심코 던진 한 마디 말이 엉뚱하게 어떤 사람의 마음을 깊이 감화시켜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수도 있을 것이다. 전교 하노라면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인간적 뿌리를 벗어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암흑 속에서도 하느님을 흠숭해야 하고, 우리가 당황할 정도로 보기 좋게 거절을 당할 때라도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전교하려는 신앙은 하느님 모습을 손상시키고 반대하며 말살시키는 것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추종하는 신앙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언제고 이런 우여곡절이 뜻하는 것과 왜 그토록 고생해야만 하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인생의 이면(裏面)을 보지 못한다. 뒤집어 놓은 주단처럼-우리는 땅만 바라보니까-하늘 쪽에서 보면 그 때 모든 자녀들이 엉클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과 에움길(둘러가는 길)이 얼마나 고마웠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될 그 때까지 지금의 우리의 모든 전교 활동은 하느님 자신의 활동처럼 해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레지오는 처음부터 그 군사들에게 그들 자신이 미약하고 텅 비어 있음을 자각하기를 요구한다.



이렇게 레지오는 그 군사들을 전교할 수 있는 은총의 상태에 있게 한다. 내가 나 자신을 죄인이라고 부를 때, 하느님께서는 나를 당신 벗이라 부르시고, 내가 나를 쓸데없는 종으로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하느님께서는 나를 거리낌 없이 또 기꺼이,"당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연장"으로 쓰신다.



제 2 장 성   모(聖  母)



당신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고자 오셨으되,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 하시기를 원치 않으셨음을 아옵기에,......



Ⅰ. 성령과 성모와의 계약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두 사랑의 계약이라고 이미 말했다. 선서에서 이를 하나의 신앙 고백이나 다름없는 확신을 가지고 결합된 성령과 성모께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성령은 우리 쪽으로 내려오는 하느님의 사랑이시다. 성모는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인간적 사랑이신데, 피조물 중에서 가정 순결한 사랑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잘 실천하기 위해서 성령과 그의 도구인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와의 이 일치가 의미하는 바를 잘 알아야 하고, 그리스도가 이 상호적 사랑의 열매이시라는 것도 매우 깊이 깨달아야 한다.



가톨릭 신경 가운데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분(그리스도)은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혈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심을 믿으며"라고, 신부는 제단에서 이 구절을 염하면서 이것이 신비 중에 신비임을 나타내기 위해 무릎을 꿇는다.(지금은 깊은 절을 한다.)



매우 단순하면서도 헤아릴 수 없는 결과 때문에 무게가 있는 이 말을 입으로 염하지만, 교회는 그 내용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미처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이를 염하는데 있어서 잠시나마 너무나 벅찬 기쁨과 그 여운이 계속 따른다는 것을 우리 중의 누군가가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행동은 그토록 심오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행동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끌어내고, 얼마나 찬란한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이를 계속 찾고, 이로서 살도록 해야 한다. 강생의 신비는 다른 신비와 달리 언제나 여일한 , 그러나 언제나 새로운 하나의 계시다.



우리는 이제 이 신비의 중심이 되는 성령과 성모와의 결합을 정성스럽게 다룰 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복음서에 기록된 과거의 사실을 되풀이하려는 것은 아니다.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이 심오한 일치가 끼치는 현실적이고도 중대한 여러 가지 영향을 철두철미하게 깨닫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실 것이다"(루가 1, 35)



이 사실은 순전히 하나의 역사적이고 우리에게서 멀리 사라진 사실에 불과할까? 그렇지 않으면 이 말씀이 앞으로 올 시대에 대비해서 하느님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활동의 불변하는 하나의 법칙을 제시하는 말씀일까?



이 문제는 참으로 중대하다. 성령과 성모와의 계약을 예수의 탄생에만 국한시킴은 그 계약이 아무리 거대하다해도 어느 순간에만 생겼다가 과거지사가 되고 마는 하나의 역사적 에피소드 정도로 축소시키는 결과가 된다. 그것은 마리아를 과거의 인물 취급하는 것이지, 현재나 앞날에 있어서의 마리아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이런 것을 바라고 계셨을까? 아니면 성령이 정녕 마리아를 영원히 감싸 주시는 것일까? 우리는 오히려 온 성교회와 함께 성령과 성모와의 일치를 영원 무궁히 이루어진 것으로 믿고 있다. 그 계약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다는 것과 그 때문에 오늘날에 있어서도 예수께서 (성령으로 동정녀이신 마리아께)보이지 않게 영환 안에 계속 태어나신다는 것을 믿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신비라는 이유, 또 하느님의 깊고 깊은 계획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실제적인 의미에서 마리아와 성교회는 하나가 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성령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난다는 것은 "성령과 교회"에서 태어난다는 것과 같고, 우리를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는 성세는 -비록 그 양식은 다르다 하더라도-성령과 교회와의 겹치면서도 동일한 모성의 열매이다.





Ⅱ. 계약의 충실성



하느님께서 맺으신 계약에 당신 스스로가 충실하다 해서 이상하게 여길 것인가?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주신 은혜에 대해 후회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잊는다는 의미다.(로마 11, 29). 이는 우리의 초자연적 생명 전체가 강생의 신비 속에 싹트고 있다는 것과, 마리아께서 우리를 영적으로, 그러나 참되게 잉태하실 때 지존하신 자의 성령이 마리아를 당신 힘으로 감싸 주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성서에, 구약 시대를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에게 얼마나 충실하셨던가를 말하는 아주 감격적인 증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충실성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과 장엄하게 맺으신 계약을 성령과 마리아의 계약과 부합시킬 수 있지 않은가? 마리아는 그 백성의 꽃이시오 화관이시기 때문이다.



"너와 나는 약혼한 사이, 우리 사이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 나의 약혼 선물은 정의와 공평, 한결같은 사랑과 뜨거운 애정이다. 진실도 나의 약혼 선물이다..."(호세아 2, 21-22)



그 밖에도 다음과 같은 야훼의 엄숙한 약속이 있다.



나는 내 계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로 말한 것을 변경치도 않으리라.

내 정성을 걸어서 한번 맹세한 것 이어니,

결단코 다윗을 속이지 않으리라,

그의 자손은 길이길이 이어지고,

그 왕좌는 태양처럼 내 앞에 있으리라,

언제나 한결같은 저 달과 같이,

하늘의 미더운 증인이리라.(시편 88(89), 35-38)



마리아에 대한 천사의 대사(大使)로서의 사명은, 예수라 불릴 아들의 탄생만을 위한 성령의 일시적 강림을 약속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예수님은 구세주가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생의 신비는 앞으로 더 광범위하게 나타날 것이고, 시대가 지남에 따라 더욱 더 찬란해 질 것이다.



마리아는 이런 사실을 이미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친히 읊으신 마니피갓(讚歌)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다음과 같은 개선 적 예언을 하셨다. 즉 "이제로부터 모든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할 것이리라." 마리아는 세상의 온 역사가 자신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계셨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다윗을 절대로 속이지 않기 위해서" 일으키신 여인이시며, "영원히 세워진 왕좌"가 되실 분이시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모친이시듯 사람의 모친도 되시고, 성령께서 위대하게 되시는 것도 마리아를 통해서이다. 마리아는 성령이 성화시키는 작용과 언제나 보조를 같이 하는 연장이 되실 것이다. 성령은 순전히 그 때문에 마리아에게 오신다.



우리는, 마리아가 하느님께 새로 창조된 분이시요, 다른 사람들보다 유달리 훌륭하신 분이라는 것, 또 태고에 물위로 날아 다시셨다던 성령이 지금 마리아에게 내린 힘을 희미하게 나타낸 하나의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 할 것이다.



신비체의 신비, 즉 머리와 지체와의 완전한 일치를 이해하면, 그 때는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하나를 아무도 분리시킬 수 없다. 성 레오 교황은 어느 날 강론 때,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리스도교 백성의 기원이 되고, 머리의 출생은 몸의 출생도 된다."라는 말을 하였다. 우리가 이 중요한 교의의 결론을 내리자면 아직도 멀었고, 우리의 세대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신비체의 신비의 본 뜻을 차츰차츰 알게 된다지만, 마리아의 심오한 모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은 틀림없다. 동껄(Doncoeur)신부의 다음 말은 모두 잘 알고 있는 말이다. "교의와 성체로 육성된 이 세대가 큰일은 하겠지만 아직도 거룩한 동정녀에 대한 연구는 해야 한다." 고.



우리도 이런 연구가 현대의 요청이라고 본다. 그러나 머리와 지체를 동시에 낳은 마리아의 유일한, 또 이중적 모성을 모르는 한, 그리고 마리아의 행동과 성령의 그것을 같은 하나의 행동으로 보지 않는 한, 마리아를 인식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1904년 2월 2일 반포된 회칙 "저 하느님께"에서 한 비오10세의 말씀을 거듭 읽고 묵상해야 한다.



썩어질 혈육을 취하신 예수께서는 동정녀의 순결한 태중에서 당신을 믿을 자들로 이루어질 영적 몸과도 결합되셨다. 그래서 마리아는 당신 태중에 예수를 품으시면서 동시에 구세주의 생명으로 생명을 유지할 이들까지도 품고 계셨다고 말할 수 있다. 사도 바오로의 말대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의 살과 뼈의 일부분이 되었으니까, 본시 동정녀의 품속에 있었던 우리는 거기서 몸의 머리가 출생될 때 머리에 딸려서 같이 출생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영적, 신비적 의미로 보아 마리아의 아들이라 불리 우고, 또 마리아는 영신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 모든 이들의 참된 어머니가 되신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다운 우리가 되는 것이다.



이 신비를 전혀 모르거나 조금밖에 모른다면, 마리아께 대한 신심은 온전히 감상적이고 불완전하며 볼품없는 신심이다. 그런 신심은 뿌리가 잘린 온실 꽃이지, 벌판에 깊이 뿌리박힌 초목이 아닐 것이다. 또, 그런 신심은 솔바람에도 나부끼는 나무 같고, 시내 물가에 심겨져 제 열매를 제 때에 주고 그 잎이 시들지도 않는 나무(시편1,3참조)같지는 않다.



마리아의 모성은 강생 자체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언제나 이 점이 모든 것의 초점이 되어야 하는데, 강생이란 어떤 의미로 보아서는 이미 구속 자체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나신 그분은 희생되시고 죽으시기 위해 나신 것이다. 그분은 태어났어도 보통 사람과는 달리 구속 제사의 제관과 제물이 되시려 나셨다.



속세의 어미니들은 사제가 될 아들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제직이 하나의 무상으로 주어진 은혜이지, 날 때부터 무슨 권리로 받은 은혜가 아니다. 저 어머니들과는 반대로 예수의 모친이신 마리아는 직접 사제를 낳으셨다. 그분은 날 때부터 "천주의 어린양"이시다.



마리아의 모성은 또 구속의 신비로써 완성된다.

마리아는 그저 말이나 비유로써 또는 어떠한 법적 규정으로써 우리의 모친이 되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고 알찬 의미로써 되신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초자연적 생명을 넘겨주시려고 예수와 협력하셨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우리의 참 어머니이실 뿐만 아니라, 그 영적 모성은 일반적 모성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우월하다. 마리아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값진 희생, 즉 자신을 죽음에 내 부치신 예수를 봉헌하시고, 우리에게 보다 더 깊은 배려를, 즉 우리가 영세할 때부터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그동안 계속 우리를 품고 계시기를 원하신다.



마리아는 견줄 수 없는 가장 큰 모성애를 지니고 계신다. 그래서 <알스>의 신부는"어머니들의 사랑을 다 합쳐도 그것은 마리아의 사랑에 비해 하나의 얼음덩어리에 불과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테르툴리아노는 하느님께 대해 "그런 아버지는 없다."고 말했는데, 성모께 대해서도 "그런 어머니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다른 장에서 따로 교회와 마리아의 관계를 취급할 때 더 잘 알게 되기를 바란다.



하느님께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 즉 마리아의 성령을 자신의 영적 생활에서 분리시키지 않는 자는 복되다, 성령이 없는 마리아는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또한 마리아가 없다면 성령은 사실상 가까이 할 수도 없는, 따라서 알려지지 않은 하느님이 되실 뿐이다.



그러기에 우리 교우들은 제 삼위(三位)를 다시 내세울 필요가 있다. 우리가 정말 활기 띤 일치를 믿는다면, 오래지 않아 성령의 가장 큰 영광과 마리아의 기쁨을 위해 그 일치에 도달할 것이다.





Ⅲ.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만드시는 성령



이 풀 수 없는 계약의 의미를 이해하였다면, 그 즉시로 성령과 마리아는 우리를 예수와 일치시키지 않으실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고자 오셨으되,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 하시기를 원치 않으셨음을 아옵기에,



이 말은 성령만이 하실 사업과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사명,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세상을 재건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은 그 사업을 계승하고 완성하실 분으로서 성자께 보냄을 받아 오신다.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 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일들도 알려 주실 것이다. 또 그분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내게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요한 16, 12-15)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신 수난으로 우리에게 공로를 다 얻어 주셨지만 그 공로는 성령을 통해서였다. 생명을 도로 주시는 생명의 성령은 내적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말씀의 지혜에로 인도하시며 앞 못 보는 눈을 보게 하시기 위해서, 또 영적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며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다.  



그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계시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무엇이 더 보태어지지는 않는다.



그 사명은 현대인들의 신앙이 나약한 까닭에 개인적으로 계시를 받는 것을 지나치게 바라는 광증(狂症)을 송두리째 뽑아내는 데 있다. 성령의 역할은 세상에 어떤 새로운 계시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계시는 마지막 사도의 죽음으로써 끝났고, 교회는 다만 유산을 완전무결하게 보존한다는 이 한 가지 사명밖에 없다.



사도들은 초기 그리스도교 때 기록된 "십이 사도 교리"라는 책대로 "누구든지 우리가 가르치는 교리를 가르친다면 받아들이고, 다른 것을 가르치거든 이를 받아들이지 말라"(Ⅰ디모 6, 3 ; 갈라1, 6-9 참조)고 말했는데 그 책도 새로운 내용을 취급한 것이 아니고 모든 이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을 전할 따름이다.



여기서 하느님께로부터 특전을 받은 영혼이 하나든지 여럿이든지 간에 그들에게 드러내신 계시는 무엇이나 다 존경할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확실히 어떤 새로운 것으로서 우리의 종교적 생활의 본질 속에 끌어넣거나, 이 생활을 지배하게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당연히 나온다, 그야말로 신비적 영혼의 소유자였던 십자가 요한만큼 절실하게 이 전통적 규범을 체험한 이는 아무도 없다.



그는 아주 드문 언변을 가지고 영혼들에게 새 것으로 갈망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몇 세기가 지난 오늘의 사람들에게는 "십이 사도 교리"가 자기도 열심히 탐구해 보았지만, 언제나 받아들일 만한 가치 있는 표준임을 거듭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한 몇 구절을 보면 그의 "깔멜의 산길"에서 인용한다. 그 구절을 보면 그는 그리스도 이후부터 나타난 부분적이고 보충적인 계시가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는 그 존재 이유가 없는가를 기묘하게 설명하고 있다.



"구약 시대에 하느님께 문의함이 옳았고, 사제들과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시현(示顯)과 계시를 원함이 무방했던 그 주요 원인은 그 당시엔 아직 믿음의 바탕이 잘 굳어지지 못 했고, 복음의 율법도 미쳐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니, 그러기에 하느님께 묻는 것이 필요 했고 한편 당신은 말씀, 시현, 계시, 또 형상과 그런 따위 아니면 다른 여러 가지 상징으로 일러 주시는 것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은총의 시대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바탕이 굳어지고 복음의 율법이 나타났으니 구태여 저런 식으로 문의할 까닭이 없고, 옛날처럼 당신이 말씀하시거나 응답하실 까닭도 없다,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당신 아드님-즉 둘이 아닌 오직 하나인 당신 말씀-을 주심으로써 일체를 우리에게 한꺼번에, 그리고 단 한번에, 오직 이 말씀으로 말씀하셨으니, 다시 더 말할 것을 지니지 않으신 까닭이다.



성 바오로께서 히브리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에 의한 예전식대로 하느님과 사귀지를 말고, 오직 그리스도께 눈길을 모으라 하심도 이 뜻이었으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1, 1-2) 이 말씀으로 사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바는 하느님은 말없이 계시고,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는 당신 아드님이신 '전부'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그분을 통하여 다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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