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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6 13:24

월간지 10월호 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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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 사도직

베데 맥그리거/장훈 요셉

레지오가 활동하고 있는 거의 모든 교구에는, 신자 쇄신 프로그램이나 성인 신자 교육 과정이 있으며, 복음화를 위한 활동과 새로운 교회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성직자들이 늘고 있으며, 본당이나 교구에 새로운 단체들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보고서나, 모임 새로운 위원회들도 적지 않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의제agenda들은 하나 같이 긴박하고 중요하게 보입니다. 종종 레지오는 이 모든 활동이나 계획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곤 합니다. 레지오는 레지오의 정신에 따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원의에 봉사하는 모든 일에 협조하려 합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릅니다. ‘레지오가 본당과 교구, 나아가서 보편교회에 공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레지오가 어떤 일에는 참여하고, 어떤 일에는 관여하지 말아야 할까?’ 제 생각에, 교회 안의 모든 활동에서, 그리고 교회의 어떤 조직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레지오가 기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레지오의 고유한 영성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우리 레지오 단원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온전한 레지오 단원이 되어야 합니다. 교본에 흠뻑 빠져서 진정 교본의 정신대로 살고 있다면, 레지오는 이미 우리가 속해 있는 어떤 교회 공동체에도 크게 공헌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레지오 정신에 충실할 때 우리는 가장 훌륭한 단원이 될 것입니다.

레지오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다양한 요구가 있습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저는 다시 한 번 레지오 사도직의 가장 핵심적인 요점 한두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콘칠리움 전임 지도신부인 Thommas O`Flynn 신부는 프랭크 더프 형제를 위한 미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더프 형제는 ‘사도직에의 부르심은 우리 삶에서 영혼의 구원 말고는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그리고 거기에 합당한 행동을 실천하는 순간에 시작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말 속에 더프 형제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랭크 더프 형제의 이 말은 또한 레지오 사도직에 대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구원 말고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레지오 단원들은 돈을 모금하거나, 그 돈을 분배하는 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습니다. 이런 활동을 하는 단체는 따로 있습니다. 모든 레지오 모임, 활동, 토의들이 종국에는 영혼의 구원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창설자인 프랭크 더프 형제의 삶의 의미이고, 그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활동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이 지상에서 우리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모두 얻는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베네딕토 교황께서는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지오는 모든 영혼을 찾아 나서서 그 영혼들에게 다가갑니다. 우리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 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 젊은이나 나이 든 사람, 건강한 사람이나 병이 든 사람, 행복한 사람이나 외로운 사람 누구에게나 사랑의 마음으로 말을 건네야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레지오 활동이나 레지오의 사도적 사랑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속적인 사도직 활동에 참여할 뿐 아니라 한 주 두 주, 일 년 이 년, 계속하여 영혼의 구원이라는 우리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우리 레지오 단원들은 지속적으로 영혼을 돌보는 일에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레지오 교본에서 보듯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영혼들을 끝없는 인내와 친절로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레지오 사도직과 관련하여 또 다른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거창한 열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레지오 활동을 어떻게 하는가도 똑같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레지오 교본이 제시하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우리 영혼에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성모님과 함께 가지 않으면 영혼들에게 다가갈 수 없다. 성모님의 정신으로 레지오 활동을 할 때라야 참 기쁨이 있다.’

모임에 충실하기 위해 치르는 희생, 명백한 실패나 어려운 상황들, 영혼의 메마름, 미미한 반응, 그리고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과도하게 요구하는 상황 등에 우리는 서서히 지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레지오 단원은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성모님과 함께 하며 성모님의 일을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다른 사람을 만날 때마다 당신과 함께 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성모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성모님은 모든 것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십니다. 점차로 우리는 레지오 사도직과 소명이 짐이 아니라 커다란 선물이며, 특권임을 알게 됩니다. 성모님은 당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성모님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이끄시고, 우리의 용감하고 왕성한 레지오 활동을 통하여 영혼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십니다.




들음의 영성

이형수 블라시오 몬시뇰

창조주께서 각자에게 입은 한 개, 귀는 두 개 주신 것은 ‘말하기는 적게, 듣기는 많게’ 하라고 그렇게 하셨단다. 한자의 거룩할 성聖자는 그 유래가 있다. 아주 먼 옛날, 왕은 신과 같은 존재이며 최상의 권위자로 여겼고 그래서 왕은 누구의 말도 귀 기울여 들을 필요 없이 일방적으로 명령만 내리는 자였다. 그러던 중 어떤 왕이 귀耳를 기울여 먼저 남의 말을 귀담아 듣고 난 다음에 말口을 하는 왕王일 때 그 왕을 거룩하게 본 것이다. 들을 청聽자도 풀이하면 듣는耳 왕王은 열네十四명의 마음心을 하나一로 일치시킨다는 뜻이다. 열넷은 완전을 상징하는 7의 갑절이므로 그지없이 완전함을 나타낸다. 이처럼 옛사람들은 들음의 가치와 신성함을 깨친 것이다. 삶에 필요한 온갖 지식, 지혜, 깨달음은 먼저 말을 정성을 다해 들을 때 이루어진다. 성공적인 인간관계를 위해서도 우선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인간 사회가 이렇듯 복잡하고 갈등이 많은 이유도 서로가 서로의 말을 경청하지 않음에서 비롯한다.

구약성경의 대헌장이라 할 수 있는 신명기 6장에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6,4-5)라고 선포되어 있다. ”들어라!“라는 표현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지상 명령이었다. 그 말씀을 따르면 살고 따르지 않으면 죽는다는 엄중한 명령이었다. 성경 전체에 ”들어라!“는 단어가 수없이 나온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은 들음으로 시작하여 들음으로 끝나는 책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신앙이란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신명 6,5)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뿐이다. 부모가 돌아가실 때 유언을 남기면 자손들은 그 말을 명심하여 듣고 실행에 옮긴다. 그처럼 신앙인은 하느님의 말씀(성경)과 교회를 통하여 전달되는 주님의 모든 말씀을 참으로 정성을 다해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자세가 절대로 필요하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위인들,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수많은 예언자들, 현자들, 성인 성녀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주님 말씀을 혼신을 다해 듣고 실천했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아, 들어라!“라는 지상 명령을 완성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전 생애를 통하여 그 말씀이 얼마나 시급하고 중요하게 실천해야 할 사항인지를 터득하셨다. 마태오복음 13장 18-23절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대목을 살펴보면 “들음”과 “실천”의 두 말마디가 핵심이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야말로 예수님 생애의 전부였다. 십자가의 죽음은 성부의 말씀을 완전히 실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신자들이 평소에 미사 중에 선포되는 성경 말씀들과 강론을 얼마나 경청하는지 궁금하다. 경험에 비추어보면 많은 신자들이 귀담아 듣지 않고 분심 속에서 흘려버리는 경우를 많이 본다. 미사 끝에 신자들을 붙잡고 오늘 무슨 강론을 했느냐고 물으면 거의 다 한마디도 옮기지 못한다. 한 부분만이라도 대답하는 사람이 극히 적다. 혼신을 다해 들으면 그 내용을 기억하여 마음에 간직하게 되고 실천할 힘도 생기게 된다. 기억과 행동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어떤 저명한 강론가에 의하면 사탄이 미사 강론 때 제일 강하게 신자들이 말씀을 귀담아 듣지 못하도록 방해를 놓는다고 한다. 사실 요즘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집중을 못하는 질병(?)에 걸려 있는 것 같다. 무수한 소음에 길들여져 있고 바쁘고 복잡한 생활에 젖어 있어 안으로 침묵을 한다는 것이 무척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성체조배 같은 침묵기도가 많이 실천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침묵 속에서 우리에게 더욱 강렬하고 뜨겁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추구하는 영성도 일종의 깨달음이며 그 깨달음이란 깊은 침묵 안에서 하느님과 만날 때에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주의 깊게 잘 듣지 못함으로 말씀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깨달음이 일어나기 어렵다. 뿐더러 말씀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기는 더욱 어렵다. 말씀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체험할 때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과의 만남도 가능하다. 그래서 미사가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혼신을 다해 경청함이 신앙생활 성공의 관건이다. 나아가 주님 말씀을 잘 들음이 구원의 관건이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마태 13,23)

마산교구 총대리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전동기 유스티노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 50) 이 말씀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 뵈러 왔을 때, 예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문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예로, 우리는 쉽게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을 떠올리는데, 그럼 완전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과 그 어머니의 사랑은 어떠했을까요?

성경은 죽음의 길을 따르며 가슴을 에는 듯한 고통을 아들과 함께 나누신 어머니의 사랑과, 십자가에 달려 숨이 끊어지는 최후의 순간까지 어머니를 걱정하시는 인간 예수의 어머니에 대한 뜨거운 연민의 정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하신 말씀은 너무 매정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하느님 나라의 입적 조건을 밝힌 것이지, 어머니와 형제들을 배척한 말씀이 아닙니다. 보잘것없는 평범한 시골 여인에 불과했지만‘믿었기에 복된 여인’이 된 마리아야말로, 하느님의 뜻을 가장 완전히 실행한 하느님 나라의 일원이 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오히려 이 말씀으로 당신 어머니야말로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실행한 자의 모범임을 나타내 보여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인생에 대한 하느님의 요구가 혈연관계보다 더 중하고, 하느님 나라의 제자들 관계가 세상의 친족관계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알리신 말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장 가까운 유대는 서로 마음이 통하고, 생각과 뜻이 일치할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실제로 생에 대한 같은 목적, 같은 정신, 같은 관심을 가진 이들끼리는 친족 이상으로 가까운 관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도 당신과 같은 뜻을 지니고 당신의 말씀을 듣고자 모인 이들에게 친척보다도 더 가까운 느낌을 가지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당신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인 대 가족을 창설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인 가족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러 오신 예수의 이상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 이상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이상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복음 전파로 하느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따라서 인류가족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입니다. 이 이상의 실현을 위해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생활을 떠나서 하느님의 뜻인 성덕과 감사와 인내와 선행을 실천에 옮겨야 되겠습니다.


부산Re. 지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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